▶이종상, ‘독도귀어(獨島歸漁)’, 한지에 수묵채색, 37.5×45cm, 1980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낯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화폐 사용도 그 가운데 하나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빈도가 예전 같지 않다. 신용카드 결제가 일반화됐고, 버스나 지하철·택시 요금도 현금으로 내지 않는다. 은행을 비롯한 각종 금융업무가 전산화되면서 지폐 구경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심지어 여러 종류의 가상화폐와 새로운 개념의 지불 수단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제 돈의 가치와 쓰임은 온라인에서 숫자로만 왔다 갔다 하는 세상이 됐다. 누런 봉투에
일원짜리 동전까지 받아 오던 아버지의 월급날 풍경은 먼 옛날 얘기가 됐다. 요즘 아이들은 명절날 할머니가 쥐여주던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에 대한 추억, 주머니 속에서 짤랑대는 동전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화폐가 지닌 아날로그 감수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세계 각국에서 발행되는 지폐는 그 나라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폐 디자인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충실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 80%가 넘는 나라 지폐에 인물이 등장한다. 위인이 주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종상, ‘기(氣)-독도(獨島)Ⅱ’, 순지에 수묵, 89×89cm, 1982
오천원·오만 원권 인물 초상화 모두 그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지폐는 모두 네 종류. 천원, 오천원, 만 원, 오만 원권이다. 각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 신사임당 얼굴이 그려져 있다. 역시 위인이다. 그런데 네 명 모두 카메라가 없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 얼굴 사진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정확한 생김새를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는 그들의 초상화는 어떤 의미에서 ‘상상화’일 수밖에 없다.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도 마찬가지다. 물론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지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 1973년 시행된 국가지정표준영정제도의 허와 실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제작된 표준영정 1호는 충무공 이순신. 당대 최고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1912~2001)이 그렸다. 월전의 친일 행적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아무튼, 천원권 지폐에 있는 퇴계 이황의 초상화는 현초 이유태(1916~1999)가 그렸고, 만 원권 세종대왕 초상은 운보 김기창(1913~2001) 작품이다. 오천원과 오만 원권에 나오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그린 화가는 같은 사람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일랑 이종상(1938~)이 그 주인공. 어머니와 아들이 동시에 지폐에 새겨진 것도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일 듯싶은데, 이 모자 초상화를 한 화가가 모두 그렸으니 이 또한 예사롭지 않은 경우다.
일랑은 대학 3학년(23세)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첫 출품 특선, 1962년 내각 수반상, 1963년 문교부장관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일찌감치 화단에서 입지를 굳혔다. 당대 최고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1892~1979)에게 영정기법을 전수받고 율곡 이이 초상을 그린 나이가 불과 35세였다. 이 초상은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랑은 우리 민족미술의 근원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조선 진경산수에 있음을 깨달았다. 고구려 벽화에 대한 이론 학습과 연구 결과는 ‘원형상(原形象)’ 시리즈로 구현했고, 진경 정신에 대한 계승은 ‘현대진경’이라 일컬어지는 ‘독도’ 연작으로 완성했다. ‘동유화(銅釉畵)’ 기법으로 제작된 ‘원형상’ 벽화는 서울 남산 국립극장 로비와 서초동 대법원 동·서쪽 벽면 등에서 볼 수 있다. ‘동유화’란 구리판 위에 돌가루와 유리 가루를 물감 삼아 그림을 그린 후, 구리판이 녹아내릴 정도로 열을 가해 완전히 밀착시키는 기법이다. 변색 없이 영구 보존이 가능하다. 동유화뿐 아니라 서울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있는 대형 기록화도 일랑 작품이다.
▶이종상, ‘원형상 9501-평등’, 동유화, 401.5×669cm, 1995, 대법원 소장. 여명·해돋이·희망·설계·꿈 등을 상징하며, 동양 고유의 동쪽을 상징하는 색상인 청색으로 표현됐다.
사실적인 묘사 초월해 독도의 ‘기’ 표현
일랑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독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다. 그는 화가로서는 최초로 1977년 직접 독도를 찾았다.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가 두 발로 조선의 산천을 답사한 것처럼 일랑 역시 우리 땅 독도를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현대진경’ 정신을 아로새기고자 했다.
▶이종상, ‘원형상 9502-정의’, 동유화, 401.5×669cm, 1995, 대법원 소장. 서쪽을 상징하는 색상인 백색으로 표현됐고, 정의로운 심판을 상징한다.│대법원 누리집
“일주일 예정으로 독도를 다녀왔다. 화가로서는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을 세우기 위해 독도를 간 것은 결코 아니다. 울릉도나 독도가 우리 땅임은 틀림없으나, 내가 평소 그렸던 내륙의 산하에 맞는 준세(?勢)로 표현이 가능할까 하는 화가로서 관심을 실험하기 위해서였고,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회화적으로 분명 우리 땅이었다. 나는 며칠간 그 외로운 섬에 묵으며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렸다. 틀림없는 내륙과 맥이 이어진 우리 땅이라는 벅찬 감동을 준세로 확인하며….”
일랑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독도 탐방기의 일부다. 이처럼 일랑은 독도에서 수많은 스케치, 즉 사생을 통해 겉모습이 아닌 독도의 ‘기(氣)’를 온몸으로 느꼈다. 단순하게 응축된 독도의 추상 이미지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