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 ‘노예선(The Slave Ship)’, 캔버스에 유화, 90.8×122.6cm, 1840, 보스턴 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영국 돈, 20파운드 지폐의 모델이 2020년 2월 20일부터 바뀌었다. 종전까지 20파운드 지폐를 장식한 인물은 그 유명한 <국부론>(1776)의 저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1790)였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인물이기에 근대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를 밀어냈을까.
주인공은 바로 윌리엄 터너. 19세기 풍경화의 대가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화가다. 영국 런던에 있는 세계적인 국립미술관인 테이트 모던미술관이 1984년부터 해마다 시상하는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도 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현대미술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을 제치고 영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터너의 명성은 2015년 개봉한 전기영화 <미스터 터너>로 재확인됐다.
빛의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터너는 일생 동안 풍경화를 그린 풍경화의 거장이다. 신출귀몰하는 빛의 움직임과 빛의 변화, 빼어난 색채 구사 감각 등 표현주의 성향이 강한 그의 풍경화 중에서도 거친 바다를 다룬 작품들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느 풍경화와 달리 터너의 풍경화는 실제 상황을 보는 듯 대단히 동적이다. 성난 파도와 눈보라, 휘몰아치는 비, 난파선 등을 소재로 즐겨 다뤘는데, 눈앞의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압권이다. 이는 빛과 색채를 다루는 그의 천재적인 회화 감각에 더해 초인적인 현장답사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림은 실제보다 더 실제여야 한다’
터너는 자신의 몸을 배의 돛에 밧줄로 꽁꽁 묶고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몇 시간이나 현장 상황을 관찰했을 정도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태풍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목숨까지 건 터너의 도전 정신은 ‘그림은 실제보다 더 실제여야 한다’는 그의 미술 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터너의 풍경화는 그림의 차원을 뛰어넘어 아예 살아 있는 생물이라 불러도 마땅하다.
터너는 1775년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은 오히려 그를 그림에 매진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터라 자연스레 나 홀로 스케치 여행에도 제약이 없었다. 20대 후반 시절부터 유럽 각지의 풍경을 찾아 해외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이탈리아는 40대, 50대, 60대에 걸쳐 세 차례나 방문했다. 그가 얼마나 답사 여행을 자주 다녔는지는 유품으로 남긴 2만 점에 가까운 드로잉을 보면 알 수 있다.
24세 때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 27세 때 정회원으로 승격됐으며 30년 넘게 교수로도 활동했다. 미술뿐 아니라 문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했다. 인물이 아닌, 대자연의 위대함과 외경에 탐닉한 터너의 풍경화에 서사가 담겨 있고 사회성이 짙은 것도 이런 풍부한 배경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호적상 기록일 뿐, 두 명의 여자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51년 7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런던의 명소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혔다.
대표작으로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 ‘전함 테메레이르호’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난파선’ ‘노예선’ 등이 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작품들이다.
미술사적으로 빛을 능수능란하게 다룬 대표적인 화가 두 명을 꼽는다면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1571~1610)와 인간 내면의 심리를 그림으로 불러낸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를 들 수 있다. 19세기 초중반 전성기를 구가하며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터너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빛의 연금술사였다.
세 명 모두 빛의 미묘한 움직임이 자아내는 신비로운 시각적 효과를 탁월하게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터너는 인물이 아닌 풍경, 그중에서도 변화무쌍하고 범접할 수 없는 대자연의 실체 포착에 평생을 바쳤다는 점에서 앞의 두 화가와는 예술적 지향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 숭배와 위선
대자연을 바라보는 터너의 인생철학, 그것을 그림이라는 예술적 성과로 이어지게 만든 장인정신, 그 둘의 화학적 결합 효과를 극대화한 빛의 구사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덧붙여 인간들의 탐욕을 폭로하는 사회고발 정신과 시대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 바로 ‘노예선’이다.
예술적 기량이 만개한 1840년에 제작한 ‘노예선’은 터너가 늘 외경의 눈으로 관찰해온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광활한 바다 한복판이 무대다. 질풍노도처럼 밀려드는 거친 파도에 곧 침몰할 듯, 위태로운 배 한 척이 보인다. 배를 중심으로 하늘 쪽으로 시선을 옮기노라면 무시무시한 기운이 엄습해온다.
태풍이 몸부림치는 바다 한가운데 고립됐을 때의 공포가 이런 게 아닐까. 사단(事端)은 이미 벌어졌고 현재진행형이다. 그림 앞 좌우, 붉게 물든 핏빛 바닷물 위로 겨우 보이는 두 손과 쇠고랑을 찬 발, 그 위로 몰려든 물고기 떼와 새 떼. 이것만으로도 참혹상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사건은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리기 약 60년 전인 1781년에 발생했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당시 아프리카에서 강제징집한 수백 명의 노예를 싣고 항해 중이던 노예선 안에 전염병이 퍼졌다. 이미 상당수의 노예는 병사했고, 악덕 선주는 고민 끝에 사망한 노예는 물론 병에 걸린 노예들도 바다 위로 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유는 단 하나. 보험금 때문이었다. 병사한 노예는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실종된 노예는 유실품으로 처리돼 보험금 지급 대상이란 점을 악용한 것이었다.
‘노예선’의 원제도 ‘태풍이 닥치자 갑판 너머 바다 위로 던져진, 죽었거나 죽어가는 노예들’로 그림 속 상황과 일치한다.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인 그림이다. 바다 한가운데 태풍 속이라는 생과 사가 달린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 백척간두에서도 보험금에 목매는 인간의 사악하고 잔인한 탐욕을 영원한 기록으로 고발한 터너. 그는 화가이기 전에 인권운동가이자 노예해방론자로 칭송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터너가 ‘노예선’을 그린 지 18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 숭배와 위선은 여전하다. 2세기 전, 인권과 절대 불변의 위대성을 지닌 대자연의 숭고함을 우리에게 일깨운 터너가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보스턴 미술관에 가면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