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고 또 밟히리라 저 강인한 질경이처럼…

2020.08.31 최신호 보기

▶박태후 화백이 죽설헌 정원에서 반려견인 진도견 ‘진순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스스로 밟힘을 선택했다. 인간이 지나다니는 길, 마차가 다니는 길,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굳이 선택했다. 당연히 발바닥과 바퀴, 타이어에 짓뭉개지고 찢겨나간다.
하지만 무성하다. 밟히면 밟힐수록 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강인한 저항이다. 그것이 식물 질경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진화의 길이다.
생명력이 질기다고 우리 민족이 붙인 이름은 질경이고, 중국인들은 차전초(車前草)라고 명명했다. 마차 앞에 있는 풀이다. 속명인 플란타고(Plantago)는 밟힘을 뜻하는 라틴어다. 일맥상통한다. 왜 질경이는 이런 밟히는 삶을 선택했을까?

▶죽설헌의 주인공 대나무가 하늘로 높이 뻗어 있다.

생태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생명체가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을 크게 정신적 스트레스와 물리적 파괴 두 가지로 나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전체가 반응하지만, 파괴는 그 부분만 망가진다. 그래서 파괴보다 스트레스가 더욱 치명적이다. 질경이는 밟혀서 찢겨나가는 물리적 파괴에 노출되어 있지만, 모든 생명체가 서로 살겠다고 다투는 좋은 환경의 숲보다 차라리 경쟁(스트레스)을 피해 길로 나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경이에겐 남들이 험난하게 여기는 길거리가 바로 보금자리다.

▶죽설헌 7개 인공 연못 가운데 하나. 새벽 일출 시간에 주변의 왕버들 나무의 가지가 여유 있게 연못을 품고 있다.

토종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민초의 정원
질경이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마구 뒹굴고 싶을 정도로 포근함을 준다. 처음에는 밟기 미안했지만, 질경이는 밟아도 좋다는 신호를 준다. 한여름의 싱싱한 생명력이 질경이 이파리 하나하나에서 알알이 뿜어져 나온다. 질경이로 가득 찬 좁다란 숲길은 마치 마법의 동굴로 이끌 것 같은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푹신푹신하다. 질경이의 강인한 이파리를 밟은 느낌이….
남들은 정원을 가꾸면 잡초를 뽑고, 잔디를 심는다. 그 잔디를 돋보이게 하려고 줄기차게 잡초를 뽑고 또 뽑는다. 왜냐하면 잡초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잡(雜)스러운 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원에 대한 선입견을 박태후(65) 화백은 거부한다. 정갈하게 가꾼 인공적인 정원은 한민족의 정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토종 나무와 채소와 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정원이 우리의 정원이라는 것이다.
그가 50년 가까이 가꾼 1만 2000평의 정원에는 그 흔한 정자 하나 없다. 정자는 양반, 귀족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서민들은 정자에 편히 앉아 쉴 틈이 없었다. 박 화백은 조선 왕실의 정원인 비원이나 부잣집 양반들이 부채 부치며 시를 지으면서 놀았던 소쇄원 같은 고급스러운 정원이 아닌 민초들의 휴식 공간을 추구했다.
나주 금촌면의 죽설헌(竹雪軒)은 일반 공개를 하지 않는다. 입구엔 주인 허락 없이 출입도 안 되고, 사진도 찍지 못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주인이 고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몇 차례 방송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았고, 많은 이들이 직접 보고 싶어 했지만 박 화백은 아직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다. 정원의 속살이 궁금했다.
8월 21일 오후, 폭염 속에 스며든 죽설헌은 속세의 짜증스러움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죽설헌의 주변은 모두 배나무밭이다.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처럼 죽설헌은 배나무밭 한가운데 있는 외로운 정원이다. 정원에 들어가는 입구엔 탱자나무와 꽝꽝나무가 양쪽에서 서로를 뽐낸다. 조금 더 들어가면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고향이 이곳인 박 화백이 고등학생 때부터 심은 나무들이다.

▶지난 50년 가까이 죽설헌을 가꿔온 박태후 화백이 연못가 조그만 의자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다.

기와로 쌓은 담장 위로 우뚝 솟은 대나무 숲
쭉쭉 뻗은 대나무는 하늘을 가릴 정도다. 정원 이름이 ‘눈 덮인 대나무’인 만큼 대나무 숲은 압도적이다. 기와로 쌓은 담장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왓장이 겹겹이 쌓여 담 형태를 이루고, 그 위를 이끼와 잡초가 감싸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난다.
“왜 돌담이 아니고 기와 담인가요?” 기와는 지붕이 제자리이지 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세월 때로는 비싼 돈을 주고, 때로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주고, 또 때로는 공짜로 기와를 수집했다. 전통 방식으로 구워서 만든 한옥집 지붕에 있던 기왓장들이다. 그가 한국의 토종 나무와 풀들의 종자, 묘목 300여 종을 전국을 다니며 모은 것처럼 그는 기와를 모았다고 했다.
“남들은 그냥 버리는 기왓장이었어요. 우리 장인의 숨결이 살아 있는 기왓장입니다. 이곳은 평지라 돌담을 쌓을 돌이 없어요. 그래서 기와 담장을 쌓았어요.”
그는 자신이 모은 기와가 몇 장인지 굳이 세지 않았다고 한다. 기와에 새겨진 전통 문양과 그 위를 덮은 덩굴과 풀잎들이 잘 어울린다.
질경이가 뒤덮은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파초 숲이 다가선다. 바나나잎처럼 크고 푸짐하다.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파초는 바나나보다 냉해에 강하다. “마치 열대 정글에 파묻힌 기분이죠? 비가 후드득후드득 넓은 파초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일품입니다. 미풍이 불면 부채처럼 너울거리고, 태풍이 불면 잎맥을 따라 갈기갈기 찢어진 잎들이 인상적입니다.” 시원스러운 잎 덕에 파초는 수묵화에서 십군자에 속한다.
연못이 나타난다. 인공 연못이다. 박 화백은 모두 일곱 곳의 연못을 죽설헌에 팠다. 연못의 주변에는 두 가지 식물만 심었다고 한다. 바로 왕버들나무와 노랑꽃창포다.

▶박태후 화백이 모은 기와장은 죽설헌의 담장이 돼 세월을 삼키고 있다.

“자연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한국식 정원”
그는 원예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야 했다. 하지만 남들이 지겨워하는 원예가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가지치기하고, 옮겨 심고, 열매를 따는 작업이 항상 신선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촌지도사가 됐다. 연금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무연한인 20년을 채우고 공무원 생활을 벗어났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조금씩 키운 죽설헌을 본격적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애초 이곳에 4959㎡(약 1500평)의 집안 땅이 있었다. 남들은 돈이 되는 배나무를 심을 때 그는 배나무를 베어내고 이런저런 나무를 심었다. 박봉의 월급을 모아 조금씩 주변 땅을 샀다. 남들은 돈 안 되는 나무를 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수묵화를 배워 3년 만에 미술대전에 입상하며 정식 화가가 됐다. 여백이 있는 독특한 현대식 문인화를 그렸다. 화가와 조경사 두 개의 직업을 가진 것이다.
그의 조경 철학을 들어보자. “자연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한국식 정원입니다. 서양의 정원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과감한 기하학적 기법으로 정원을 만들어요. 일본의 정원은 자연을 축소해 집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분재 등 고도의 인위적인 방법을 구사합니다. 한국 정원은 나무를 있는 그대로 두었어요. 잔디보다는 채소를 키웠어요. 현재 한국의 정원은 대부분 일본풍과 서양풍 일색입니다.”

▶질경이가 마치 카펫처럼 깔린 숲속 길바닥

자연의 힘을 빌린 정원 가꾸기
그가 직접 판 연못 주변에 왕버들나무와 노랑꽃창포를 심은 것은 오랜 경험과 전문 지식의 결과다. 물가에 심은 왕버들나무와 노랑꽃창포는 무수히 많은 잔뿌리가 물을 정화한다. 각종 물고기의 은신처와 산란처가 되고 물총새, 뜸부기, 왜가리 등의 놀이터가 된다. 습지 생태 조경의 새로운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연못 주변에는 정자도 벤치도 없다. 조그만 나무 의자 한 개가 있다. 그의 소박한 쉼터다. 그는 넓은 정원을 가꾸는 데 자연의 힘을 빌린다. 지나치게 풀이 무성하면 적당한 높이로 깎아줄 뿐이란다. 그늘진 산책길에는 질경이가, 햇빛 잘 드는 곳엔 봄까치꽃, 민들레, 자운영이 알아서 자란다. 연못에는 물수세미, 자라풀, 부들 같은 수생식물이 퍼진다. 무성한 숲속에 새들이 스스로 날아들어 정원은 큰 새장이 된다. 사철 갖가지 새들이 지저귄다. 기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저희끼리 알아서 생태계를 이룬다.
“매화꽃이 바람을 타고 함박눈처럼 펑펑 쏟아져 내려, 유리 창문에 마구 부딪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의 죽설헌 자랑에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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