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이 되어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아이는 곧잘 쪽지나 편지를 준다. 주로 색종이에 그림과 함께 몇 자 적는 정도인데, ‘사랑해요’ ‘감사해요’처럼 판에 박힌 말을 쓸 때도 있고 받침이 엉망인 글자로 뭔가를 부탁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을 적어놓을 때도 있다.
한글을 늦게 익힌 아이가 글자를 읽고 쓰는 게 기특해서 쪽지나 카드를 받을 때마다 격하게 반응해 주었더니 그것이 정말 엄청난 선물이 되는 줄 알고 아이는 “그럼 내가 카드 한 장 써줄까?”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했다.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의 생일에도 ‘사랑해요’와 안마 이용권 같은 것을 들고 와 뽐내며 내밀고,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기거나 용서를 구해야 할 때도 쪽지를 쓱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편지가 쌓여갈 때마다 보관에 어려움을 겪는데, 처음에는 서랍에 모아두었다가 최근에는 사진으로 찍어놓은 뒤 정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들키면 큰일 난다).
여러 장의 사진 맨 앞에는 제일 처음 받았던 편지 사진이 있다. 일곱 살이 되어 한글 공부를 막 시작한 아이는 낱말 카드로 글자를 익혔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때는 아이가 글자를 술술 읽고 직접 편지를 써준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막연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방에 들어온 아이가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나갔다.
“엄마, 편지야. 이따 읽어봐.”
세 번 접어 꾸깃꾸깃한 노란 종이 뭉치는 편지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쓰레기인 줄 알고 그대로 버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받침이 없는 글자 몇 개만 읽고 쓸 줄 아는 아이가 노란색 색종이에 처음 써준 것은 ‘아사 소소소’ 다섯 글자였다. 삐뚤빼뚤하지만 빨간 색연필로 커다랗고 호방하게 쓴 글씨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나는 다섯 글자를 소리 내어 읽으며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했다.
한참 뒤에 방에 온 아이가 편지 읽어봤어? 하고 물었다.
“응. 그런데 무슨 뜻이야?”
“엄마. 그거 무슨 뜻인지 몰라?”
“모르겠는데. ‘아사 소소소’라고만 써 있어서.”
“어, 이상하다. 그거 ‘엄마 사랑해요’라고 쓴 건데. 왜 모르지?”
설명을 들어보니 아이는 편지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아는 글자를 쓰면 그게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된다고 믿고 있었다. 아, 사, 소는 아이가 아는 글자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중에 제일은 ‘소’였다. 마지막에 소가 여러 번 들어간 이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글자 수도 안 맞지만 나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꼭 껴안아 주었다.
그 뒤로도 해독 불가능한 글자로 이루어진 편지를 몇 번 더 받았다. 그것은 ‘아사소사’일 때도 있고 ‘소이바자라’인 적도 있었다. 글자 수는 점점 늘어나고 뜻도 복잡해졌다. ‘진짜 엄마, 사랑해요’라고 쓴 편지를 받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아이는 받침이 있는 글자를 틀리긴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글로 쓸 줄 안다. 혼자서 일기장 같은 것을 만들어 문장을 길게 쓰고 뜻을 풀이해주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편지에 농담까지 적어준다. 몇몇 육아 선배에게 이야기했더니 뻐기고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마저 끊기는 날이 있다고, 지금 많이 즐겨두라고 했다.
그 뒤로 ‘진짜 사랑해요’라고 쓰고 뒤에 뚱뚱한 하트까지 그려 넣은 쪽지와 카드를 여러 번 받았지만, 처음의 ‘아사 소소소’를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내가 한글을 처음 배웠을 때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처음 쓴 편지는 누구를 향한 것이고 뭐라고 썼을까. 사람들 모두에게는 처음의 편지가 있었을 것이고 수신인이 있었을 텐데, 그 편지와 마음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