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산불로 타 죽은 코알라사진. 이 동물의 죽음에는 인간의 책임이크다.
요즘 영화는 물론 TV, 유튜브, 다큐멘터리, 광고 등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드론은 이 세상의 정보를 새롭게 구성해서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무대와 장소가 바뀔 때, 먼저 배경이 되는 그 장소의 전체 모습을 정지 화면으로 보여주곤 했다. 장면이 펼쳐질 도시의 전경이나 특정 건물을 보여준 뒤 내부로 들어가는 식이다. 요즘에는 그런 장소의 전환을 드론 영상으로 대체하고 있다.
또 액션 영화에서 자동차나 사람이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촬영한 장면은 드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유한 시각이다. 과거에는 레일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거나 사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따라가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했다. 지상에 붙어서 이동하는 레일(또는 사람)과, 공중을 날아다니고 높낮이를 바꿔가며 찍는 드론은 확연하게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드론은 배우들의 머리 위에서 촬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레일을 깔 수 없거나 사람이 뛰어다닐 수 없는 곳, 도시의 주택가 지붕 위나 고층 빌딩의 표면, 불규칙한 산악지대, 강이나 바다 모든 곳을 훑고 지나다니면서 눈부시게 역동적인 장면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 공중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
2015년작 <쥬라기 월드>에는 익룡이 날아가면서 공룡 테마파크의 관객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드론으로 수많은 군중이 아비규환 속에서 달아나는 장면을 찍는다. 이 장면에서 드론의 시각은 결국 인간을 공격하는 익룡의 눈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제한적인 사람의 눈을 새의 눈으로 확장한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늘을 나는 것, 그것은 땅에 붙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포유동물인 인간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인류는 힘들여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는 한 새의 눈을 가질 수 없다. 새의 눈, 즉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의 본질은 무엇일까?
▶드론으로 촬영한 서울 강남의 야경. 유튜브 채널 Skinnys cool videos 화면 갈무리
‘새의 눈’이 되고 싶은 욕망
새의 눈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어느 정도 실현해준 첫 번째 테크놀로지는 건축이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권위가 높이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늘 높은 곳을 차지하고자 한다. 그런 욕망이 건물의 높이 경쟁을 낳는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에서는 이미 100m가 넘는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면 제련 기술의 발전으로 거대한 제철소에서 강철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된다.
공학자들은 이 재료의 가능성을 실험해 20세기가 되기 전 무려 300m가 넘는 에펠탑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에펠탑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조각품으로서 기능이다. 사실 그것 말고 별다른 쓰임이 없다는 점에서 에펠탑은 확실히 예술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그때까지 건축물이 한 번도 갖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기능이다. 그것은 바로 전망대다. 탑은 과거에도 있었다. 고대에는 위대한 황제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높다란 원주를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바라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기념비보다 훨씬 큰 에펠탑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올라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밖에 없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런 높은 탑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기분이 어떨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영화가 있다. 스페인의 거장 루이스 부뉴엘이 감독한 1952년작 <이상한 정열>이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단히 권위적이고 지배적이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차지하려 한다. 그녀를 높은 탑에 데리고 올라가 그는 말한다. “늘 여기서 내려보길 좋아했어. 난 높은 곳이 좋아. 사물이 순수하고 깨끗해 보이거든.”
땅에 붙어 사는 사람들은 지상의 기쁨은 물론 그곳의 슬픔과 고통 역시 뼈저리게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갈등과 반목, 잠깐의 행복, 대부분의 지리멸렬한 삶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조금씩 그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보자. 고통스럽게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의 모습도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높고 안락한 방에서 보면, 즉 파라오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질서정연한 군무처럼 보일 수 있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헬기를 타고 다니며 하늘에서 본 지구의 곳곳을 찍은 사진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지구는 마치 아름다운 추상화 같다.
▶위성에서 찍은 호주 산불 사진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하는 드론 영상
최근 기후 위기에 따른 여러 가지 현상 중 하나로 대규모 화재가 브라질과 호주에서 있었다. 외신들이 전하는, 위성에서 촬영한 불타는 남미와 호주의 사진은 어떤 인상을 줄까? 베르트랑이 찍은 평화로운 사진과 달리 산불 사진들은 고통스러운 현장이다. 하지만 이 산불 사진들 역시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나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바라보는 끔찍한 사건과 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그 안의 고통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 사진과 대조적으로 그 내부로 들어가서 찍은 사진은 고통스럽다. 앙상하게 타버린 나무들 사이 길바닥에 누운, 불타 죽은 코알라 사진이 그런 경우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자신의 온몸이 타 들어가는 고통에 신음했을 코알라를 느꼈다. 전쟁 사진으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는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사진이 삶의 현장 속으로 다가갈수록 삶의 기쁨과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사진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다. 반면 높다란 건물 위로 가서 인간 세계를 찍으면 삶의 구체성은 증발되고 대상은 마치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이상한 정열>의 권위적인 남자 주인공이 말한 ‘사물의 순수성’이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순수성이 바로 새의 눈으로 본 시각의 본질이다.
나는 유튜브의 일부 채널이 흔히 보여주는 서울의 드론 영상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 영상에는 대한민국이 현재 겪고 있는 극심한 갈등, 고통, 혼란이 완벽하게 제거된다. 거기에는 현재의 역사가 없으며 오로지 긍정의 세계와 밝게 빛날 미래만이 있다.
그것은 파라오와 같은 지배자가 보고 싶은,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일 것이다. 분명 자긍심이 넘쳐나는 장면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드론 영상은 일종의 위안이며,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순수하고 질서 정연하고 아름답고 볼만한지 웅변하고 있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