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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지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닌 지 반년이 넘은 것 같다. 마스크를 쓴 채 길을 걷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수업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시간이 자꾸만 쌓여간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물리적으로는 답답하고, 얼굴과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심리적 거리감을 갖게 된다. 더운 날 마스크를 쓴 채 숨을 쉴 때면 속상함은 두 배가 되고 마음의 회복도 더딘 것 같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다 나쁘지만 사람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나쁘다. 거리두기를 해야 하고 대면하지 않는 게 좋고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중요한 철칙들이, 사람 사이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人間)다워지는 본성을 억압한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악수를 하던 습관, 마주보고 앉아 음식을 먹던 습관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인간다움도 아프지 않고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당분간 거리를 두고 만남을 자제해야 하지만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동안 당연하게 해오고 의심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상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코로나19 이전을 순수하게 그리워하기도 하고, 코로나 시대 이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느끼는 건 바로 화가 난다는 감정이다. 모이지 말라는데 모인 사람들의 소식에 화가 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고, 마스크를 쓰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주먹질하는 사람 때문에 화가 나고, ‘걸리면 걸리는 거지, 별로 아프지도 않다더라’ 하고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 때문에 화가 난다.
사람에게 화가 나고 사람이 미워진다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호흡기로 들어와 폐로 전이되고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다양한 인간에 대한 혐오는 우리의 감정을 타고 들어와 의욕과 기대를 망가뜨리고 의지를 꺾는다.
뉴스를 보다 보면 나도 이런 세상에서 무엇에 대해 써야 하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글을 쓴다는 게 가능한가, 회의적인 생각에 빠진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이 시기를 지나가려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하는데 미디어와 누리소통망(SNS)은 그런 자극적인 소식을 보여주고 퍼 나르는 데 열심이다.
비판과 혐오는 쉽지만 돌아보고 헤아리고 손 내밀기란 쉽지 않다. 전자는 즉각적이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후자는 굉장한 저항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애를 잃는 일이 도처에 널렸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시기를 잘 지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회복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와 자연보호에 눈을 돌리며 급속히 황폐화돼가는 흐름을 늦춰보려고 한다. 주변에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 동물을 돌보는 사람, 초록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나는 뭔가 살리고 가꾸는 일에 소질이 없어 시도하지 못하지만 나무와 식물의 초록색이 마음과 생각을 정화해준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외출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평소보다 주택의 담벼락을 장식한 담쟁이를 유심히 보고 키가 큰 가로수와 화단의 식물을 가만히 올려다보거나 오래 내려다본다.
그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만났던 몇 해 전의 책 읽기 수업을 떠올린다. 책 한 권을 읽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같이 얘기하던 강의실 풍경과 좋아하는 문장을 읽을 때 환하게 불이 켜지던 사람들의 얼굴, 떨리던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 마음이 통하는 순간에 감격하는 인간이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지 상기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혐오하는 사람의 행동이나 얼굴을 보며 욕하고 화를 내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웃음 짓게 만드는 사람의 말이나 목소리, 얼굴을 꺼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애가 훼손되지 않아야 이 모든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멈출 수 있고 서로를 건져낼 수 있다.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