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여덟 살짜리 아들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벽돌(브릭) 장난감에 눈뜨게 되었다. 사실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만화적인 구조물이다. 그중의 몇 개는 완성한 뒤 선반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곤 한다.
하얀색 캠핑카는 아이가 세 살 때 처음 구입한 벽돌 장난감이다. 아내가 하루 종일 수업이 있던 토요일. 아들과 같이 거실에 앉아서 캠핑카를 조립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여름이고 비가 내렸고, 한낮인데도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때문에 형광등을 켜고 있어야 했다. 벽돌 장난감은 처음이었다. 아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에게도 그랬다. 다 만드는 데 네 시간쯤 걸린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야기될 만하거나 기억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냥 나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벽돌을 끼웠다 뺐다 했고, 아들은 네 시간 동안 아빠가 그러는 걸 보면서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창밖의 도로에서는 차들이 빗물을 튀기며 지나다녔고 나는 왜 사람들이 힘들게 이런 걸 만드는지 이해해보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끔 아들이 옆에서 지켜보다 언제 다 만드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가 엄마가 오기 전에 될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는 사람마다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아주 길게 했던 것 같다. 그때는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허기가 지고 눈이 침침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곳에 있던 다른 것들이 생각난다. 습했던 공기와 겨우 걷기 시작한 아이의 몸 냄새와 아이가 했던 말과 묻고 칭얼대던 목소리. 그런 것들이 진흙처럼 동그랗게 뭉쳐져 만들어낸 어떤 정서가 내 안에서 가만히 떠오른다. 하얀색 벽돌 캠핑카는 아내가 오기 전에 완성해서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고 덕분에 지금도 기억나는 아이의 눈부신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아내가 오기 전에 캠핑카는 지붕이 뜯기고 바퀴가 분리되고 차 문이 떨어져 나갔다. 그 뒤로 몇 번이나 부서진 곳을 손보고 잃어버린 벽돌을 찾아 끼웠는지 모른다. 그러다 가끔은 기억도 벽돌처럼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분실되고 손상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인생 삶의 한 속성 같기도 했다.
어떤 물건은 가만히 보고 있거나 한참 만지고 있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마치 물건과 장면이 가늘고 약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물건에 달린 끈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면 장면이 따라 나오는 것 같다.
아들에게 만들어주고 아들과 함께 만드는 벽돌 장난감처럼 집에 있는 책장도 내 앞으로 어떤 장면을 끌어다준다. 정확히 말하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그렇다. 책장에는 1000여 권의 책이 있고 나는 그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좋아한다. 책등에 있는 제목을 읽거나 손이 가는 대로 한두 권씩 뽑아 표지 디자인을 보기도 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기도 하는데 처음 한두 장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책과 관련된, 그 책을 처음 읽던 어떤 순간들이 떠오른다. 사진을 볼 때와 비슷하다. 사진을 볼 때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볼 때보다 훨씬 풍부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요즘은 아들과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고 있다. 소파에 앉아 내 무릎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 <모모>를 읽어준다. 혼자서 남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여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아이 목소리를 냈다가 노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악당의 대사가 길어지면 목이 쉴 때도 있다. 그런 순간이 아이의 모습과 함께 고스란히 책에 스미는 느낌이다. 아들이 어른이 된 뒤에도 <모모>에 달린 가늘고 약한 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면 내가 책을 읽어주던 때의 장면이 따라 나올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에게도 자기만의 물건이 생기고 물건과 관련된 장면들이 생길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아들의 물건과 사연은 하나둘씩 늘어날 것이다. 그중의 몇 개에는 아빠와 함께한 순간이 담겨 있기를.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강태식_ 소설가. 2012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 <굿바이 동물원> <두 얼굴의 사나이> <리의 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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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