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영웅배투만선생상 (英雄裵套曼先生像)’, 한지에 수묵 채색, 190×130cm, 2005
문장에 찍힌 쉼표처럼 일상이 잠시 멈춘 요즘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처럼 초고속으로 변하는 세상을 뒤쫓기 버거울 때가 많다. 한때 유행하던 말이 어느새 철 지난 얘기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통의 현대적 계승’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같은 슬로건 말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사이 경계나 시공간의 한계도 흐려졌고, 이런 경향은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예술은 민족이나 국가, 종교나 인종 같은 외적 요인, 즉 사회문화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장르의 고유한 특성과 차별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예술 분야 칸막이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혼성(混成)과 혼종(混種)이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화적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전통’이니 ‘한국적’이니 하는 소리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꼰대의 넋두리로 들리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런 배경에서 새삼스레 팝아트를 생각해본다. 팝아트(Pop Art)란 말 그대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미술 형식이다. 잘 알려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1928~1987)은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미술의 주제와 권위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거부한 인물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불기 시작한 팝아트 광풍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표방하며 현대 미술사에 끼친 팝아트의 영향력은 인터넷 등장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사건이자 충격 그 자체였다.
팝아트 세례 받은 현대적 초상화
동양화가 손동현의 그림은 낯설지만 흥미롭고 재밌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대중문화와 순수미술, 전통과 현대, 창작과 인용 등 생각할수록 많은 얘깃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앤디 워홀의 후계자로 손색없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손동현은 1980년생. 이제 막 40대 나이에 접어든 비교적 젊은 작가다. 그렇지만 벌써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OCI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될 만큼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손동현의 그림은 한마디로 한국적 팝아트의 전형이자 신개념의 ‘하이브리드 퓨전(Hybrid Fusion) 동양화’라고 할 수 있다.
손동현이 그린 마이클 잭슨 초상화를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카메라가 등장하기 이전, 초상화는 인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가장 대표적인 회화 양식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화가의 이런 태도를 일컬어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한다.
손동현은 마이클 잭슨 초상화를 통해 현대적 의미의 전신사조를 구현했다. 2008~2009년 2년 동안 손동현은 거의 실물 크기로 마이클 잭슨 초상화를 무려 40점이나 그렸다. 데뷔 때부터 사망 전까지 마이클 잭슨이 발표한 싱글앨범 사진을 근거 자료로 삼았다. 연대기적으로 그려진 초상화는 백인이 되고자 했던 흑인 마이클 잭슨의 외모 변천 과정이 왜곡 없이 재현되고 파노라마처럼 기록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 하나 더. 유년기 마이클 잭슨은 호피 무늬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붉은 용상(龍床)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붉은 용상은 오직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다. 마이클 잭슨은 1989년 처음으로 ‘팝의 제왕’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러니 용상에 앉은 마이클 잭슨 초상화는 1989년 이후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왼쪽부터) 손동현, ‘영웅배투만선생상 (英雄裵套曼先生像)’, 한지에 수묵 채색, 190×130cm, 2005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Got to Be There)’, 한지에 수묵 채색, 194×130cm, 2008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Ben)’, 한지에 수묵 채색, 194×130cm, 2008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Heal the World)’, 한지에 수묵 채색, 194×130cm, 2008~2009
손동현, ‘Portrait of the King(One More Chance)’, 한지에 수묵 채색, 194×130cm, 2008
주제는 가볍지만 의미는 무거운
한편 손동현은 일찌감치 팝아트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려왔다. 오죽하면 2006년 첫 개인전 제목이 <파압아익혼: 波狎芽益混>이었을까. 이 말은 ‘팝 아이콘(Pop Icon)’이란 말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그때 선보인 작품은 ‘NIKE’ ‘STARBUCKS COFFEE’ ‘BURGER KING’ ‘coca cola’ ‘adidas’ 같은 해외 유명 브랜드와 상표를 전통적인 민화풍으로 그린 <문자도> 시리즈를 비롯해 슈퍼맨, 배트맨, 슈렉, 터미네이터, 스타워즈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초상화였다.
이처럼 손동현 그림의 겉모습은 현대적이고 대중적이지만 형식은 철저히 전통적이고 전문적이다. 주제는 가볍지만 의미는 무겁고 진지하다. 좋은 화가는 생각을 많이 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그들의 그림을 보는 관객 역시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PS. 때마침 손동현 개인전이 8월 25일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있는 교보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부채와 두루마리에 그려진 작은 그림을 볼 수 있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