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흑산도 비비추/ 에키네시아/ 매미꽃
생김새가 이슬람교도의 터번을 닮았다고 해서 튤립이다. 복스럽고 둥근 꽃잎이 사랑스럽다. 꽃말이 대부분 사랑과 닿아 있다. 보라색 튤립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고, 빨간색 튤립은 사랑의 고백이다. 노란색 튤립은 헛된 사랑, 하얀색 튤립은 실연이다. 사랑은 결코 투자나 투기가 아니지만, 튤립은 인간의 헛된 투자를 유혹한 꽃이다.
400년 전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이 최고의 투자 대상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증권거래소가 들어서고 자본이 대량 유입되며, 당시 신비의 꽃으로 불린 튤립에 투기 광풍이 불었다. ‘화단에 튤립이 몇 송이나 있는지’가 부의 기준이 됐다. 튤립 한 송이 가격이 당시 집 한 채, 황소 네 마리, 돼지 여덟 마리 가치였다. 당연히 누구나 튤립 재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고, ‘단순한 꽃을 비싼 돈 주고 살 필요가 있나?’ 하고 깨달은 순간 가격은 폭락했다. 최고치의 1% 수준에 가격이 형성됐고, 금보다 비싸던 튤립은 휴지 조각이 됐다.
한택식물원의 이택주(80) 원장이 굳이 튤립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때 식물이 인간의 욕망을 휘젓고, 부를 이루는 헛된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식물(植物)의 가장 큰 특징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땅에 심어져 있다. 동물(動物)은 움직인다. ‘정지’와 ‘이동’이라는 대치되는 개념이 동식물의 본질적인 차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자신의 의사도 밝히지 못하는 식물은 동물인 인간이 보기엔 답답하다. 인간이 꽃을 사랑하지만 대부분 일방적인 사랑이다.
이 원장에겐 이런 상식이 안 통한다. 그는 평생 식물과 대화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식물의 아픔을 느끼고 즐거움을 함께했다. 같이 온몸으로 햇빛을 반겼다. 남들이 보기엔 길가에 난 하찮은 풀이지만, 그에겐 모두 이름이 있고 보듬고 함께할 사랑의 대상이었다.
▶(왼쪽부터)미국 수국 애나벨/ 수국/ 산수국/ 참나리
20만 평 규모 식물원 개인이 직접 일궈
경기도 용인시 비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한택식물원은 모두 66만㎡(약 20만 평) 규모다. 현재는 23만550㎡(약 7만 평)만 일반에게 개방된다. 이 넓은 식물원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개인이 일구었다. 흔히 이 원장을 만난 이들은 의심 없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모님을 잘 만나셨네요.”
이런 규모의 식물원을 당대에 가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냥 식물원도 아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자생식물원이다. 한민족, 한반도의 식물을 모아놓았다는 뜻이다. 개인이 거의 40년간 사비를 들여, 수입종이 아닌 자생종을 모았다는 것에 진한 감동이 몰려온다.
▶선인장
7월 16일 오후 이 원장은 한택식물원을 이곳저곳 다니며 세 시간 동안 직접 설명했다. 팔순의 나이인데 허리가 조금도 굽지 않았다. 식물원 비탈을 오르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쉼 없이 꽃과 풀과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려 1만여 종의 식물이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이곳에 자리 잡았다. 소매를 걷고 팔뚝을 보여준다. 손목 근처에 뼈가 불거져 있다. 평생 호미질을 해서 생긴 ‘훈장’이다.
그가 식물에 쏟은 집념을 숫자로 확인해보자. 그가 수집한 모란이 350종류이고, 작약은 120종류다. 예수가 못 박혀 숨진 십자가의 재료로 기독교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산딸나무는 무려 480종류가 이 식물원에서 자라고 있다. 전 세계 식물원 가운데 가장 많은 종류를 모았다고 자랑한다. 인공으로 만든 정원에는 물속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다. 빽빽하게 심어놓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식물원을 걷다 보면 탁 트인 공간에 잔디가 잘 가꿔져 있다. 여유며 여백이다. 숲속에 의자도 많다. 틈나는 대로 앉아서 숲과 공감하라는 뜻이다. 이 원장의 철학이고 의지다.
▶알리움 퍼플 센세이션
유럽 30여 개국 배낭여행하며 식물원 탐방
자생식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열대식물을 모아둔 실내 식물원에는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도 있다. 높이가 10여 m에 이르는 열대 선인장만 모아둔 실내 정원도 있다. 직접 외국 현지에 가서 구입해 화물선에 실어 날랐다. 북한에만 자생하는 식물은 중국에 가서 구해왔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는 왜 수백억 원을 들여 이런 식물원을 평생 만들었을까? 애초 그는 식물과는 전혀 관계없었다.
“용인이 고향입니다. 서울공고와 한양대에서 토목을 전공했어요. 졸업하고 설계회사에 취직해 도시설계를 했지요. 여관방에서 잠자며 돈을 벌었어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때의 로망은 고향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초원에서 소를 키우며 사는 것이었어요.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처럼 말이죠.” 그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한택식물원을 가꾼 이택주 원장
이 원장은 설계 일을 하며 번 돈으로 고향에 조금씩 땅을 샀다. 30대 중반 도시 생활을 접고 목장을 시작했다. 초원을 가꾸고 소를 키웠다. 현실은 노래와 달랐다. 솟값이 폭락했다. 소 한 마리를 150만 원 주고 사다가 3년 키웠더니 90만 원이 됐다. 미국 쇠고기가 수입되는 바람에 망했다.
목장을 포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는 심는다고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말라 죽었다.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국내에는 나무 전문가가 없었다. 유럽 30여 개국을 배낭여행하며 각 나라의 식물원을 구경했다.
“그때 결심했어요. 내 평생 노력으로 ‘번듯한 식물원을 만들겠다’고….”
▶연꽃
“자생식물은 살아 있는 생명 문화재”
한택식물원에는 1만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이 가운데 한반도에만 자라는 자생종은 3800여 종. 식물원을 처음 만들 당시 외국종은 살 수가 있는데, 자생종은 파는 곳이 없었다. 돈이 된다는 조경수를 제쳐놓고, 자생식물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설악산, 지리산, 태백산, 한라산, 울릉도, 진도 등 국내 구석구석을 다녔다. 그때는 산에서 자생식물 채취하는 것을 법으로 규제하지 않았다. 설악산 향로봉에서만 자라는 ‘난쟁이붓꽃’, 울릉도에서 자라는 ‘두메부추’ ‘섬귀노루’, 한라산에서 자라는 ‘비로용담’ 등 낯선 식물이 이 원장과 대화를 시작했고, 함께 생활했다. 주왕산 암벽에 자라는 ‘둥근잎꿩의비름’을 수집하려 하다 추락해 큰일을 당할 뻔했다.
그런 노력으로 한택식물원은 국내 희귀식물의 보물창고가 됐다. 가시연꽃, 개병풍, 노랑만병초, 단양쑥부쟁이, 대청부채, 독미나리, 백부자, 연잎꿩의다리, 층층둥글레, 털복주머니란, 홍월귤, 날개하늘나리, 솔붓꽃, 제비붓꽃, 각시수련 등등. 한택식물원이 관리하고 있는 멸종위기 식물이다.
도와주는 이가 있었다. <대한식물도감>을 쓴 이창복(1919∼2003) 선생, <한국식물도감>을 펴낸 이영노(1920∼2008) 선생. 이영노 선생과는 동강할미꽃, 태백기린초, 둥근잎정향나무 등 신종을 10개 이상 발견했다.
▶바오바브나무 앞에서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1980년 일본이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가입하면서 일본에서 야생화 붐이 크게 일었는데,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으로도 번지며 한택식물원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내 야생화에 대해 알아볼 곳이 한택식물원이 유일했다.
“한국은 ‘종자 빈국’입니다. 국제경쟁력이 약해요. 병 고치는 약의 70%가 식물에서 나옵니다. 식물원은 그 종자를 보존하고 연구, 교육하는 보물창고 같은 곳입니다. 그러니 자생식물은 살아 있는 생명 문화재라고 할 수 있어요.”
영국은 1만 8000여 종, 독일은 3만여 종, 미국은 5만 종의 종자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30만 종. 이 원장이 아직도 식물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