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구치 계곡의 오토캠핑장
“불멍하자.”
엥! 뭐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친구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찌그러진 빈 페인트 통을 꺼낸다. 그리고 송곳으로 통 사방에 바람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손놀림이 익숙하다. 오랜 기간 캠핑을 해온 친구라 믿음이 간다. 파도 소리가 정겹다. 얼마 만의 캠핑인가?
코로나19로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오토캠핑’(자동차로 이동해 텐트를 치고 즐기는 야영으로, 텐트를 치지 않고 자동차에서 잠을 자고 머무르는 ‘차박’과는 차이가 있다)이 대세인 시대에 우리도 맛보기로 했다. 이름 하여 ‘진갑 여행’. 고등학교 시절 봉사 서클 활동을 함께하던 친구들이다. 대부분 1959년생. 2019년 환갑 기념으로 함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고교 졸업 후 모두 다른 대학을 다니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한 친구들이다. 환갑 다음 해 진갑(進甲) 여행이라고 ‘꼰대’스럽게 이름 붙여 동해안에 온 것이다. 마침 한 친구가 최근 중고 11인승 승합차를 구입해 그 차로 오토캠핑을 해보기로 했다.
“이제 다시 한 살이다. 새로운 60년을 향해 건강하고 열심히 살자꾸나.” 그런 거창한 구호를 외치며 함께 서울에서 차를 타고 동해안 노봉해수욕장에 왔다. 7월 3일이다. 해수욕장은 정식 개장을 하지 않아 인적이 드물다. 오토캠핑장을 예약하기로 했던 친구는 이미 석 달 전 예약이 끝난 상태라 난감해하다 노봉해수욕장을 찾아냈다. 전국 대부분의 오토캠핑장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한두 개의 텐트가 눈에 띌 뿐 한적하다.
▶보름달이 비치는 여름밤에 진실 게임을 하며 추억을 쌓았다.
해안가 나무숲에 차 대고 텐트 치기
오전에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은 처음 경험하는 오토캠핑에 마음이 설렌다. 동해안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고교 시절 좋아했던 여학생 이야기, 골치 아픈 자식들 이야기, 무서운 아내에 대한 이야기 등 ‘아재’들의 수다가 깔깔대며 계속 이어진다. 강릉 중앙시장에 도착해 회 한 접시에 매운탕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시장을 보았다. 꼼꼼하게 물건을 고르는 친구와 대충 사자는 친구가 티격태격 다툰다.
마음이 급해진다. 왜냐하면 대형 텐트를 쳐야 했기 때문이다. 차 뒤 트렁크와 연결해서 널찍한 텐트를 쳐야 하는데 그 텐트를 가져온 친구도 한 번도 쳐본 일 없다고 한다. 새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도 경험이 없다고 한다. 불안하다. 날이 점차 어두워진다. 대부분 현역 군복무를 했기에 옛 경험을 살리면 기본은 할 것이라 위안을 삼는다.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 때리는 ‘불멍’은 오토캠핑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해안가 소나무 숲에 차를 댔다. 뒤 트렁크를 열고 텐트를 담은 대형 주머니를 꺼냈다. 텐트를 가져온 친구는 “설명서 보고 잘 쳐봐”라고 말하며 식사 준비를 한다.
“걱정 마. 금방 칠게.”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설명서를 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지대와 텐트 천을 이리저리 돌리고 맞춰보려 했지만 모양이 안 나온다. 이때 ‘영웅’이 등장한다. 그는 현역이 아닌 6개월 방위(의가사 제대)로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몸을 쓸 때마다 대형 텐트가 모양을 잡아간다. 아! 그는 공대 출신이라 설계도에 익숙했다.
드디어 30분 만에 텐트가 완성됐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석쇠에 고기도 굽고, 시장에서 산 간고등어도 굽고, 오징어도 데치고…. 푸짐한 저녁이 준비됐다.
▶진갑 여행을 기념하는 사진
모두를 침잠하게 만드는 모닥불
캠핑에 익숙한 친구가 식탁을 준비한다. 두꺼운 널빤지에 나사못을 박아 다리 두 개를 붙이고, 차 뒤에 걸치니 훌륭한 즉석 식탁이 됐다. 접이식 의자도 등장했다. 풀벌레 소리를 배경으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모기향도 피웠다. 애초 이곳은 모기가 주인인데, 인간이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밤바다를 보자고 한다. 황량하지만 젊은 시절의 추억이 가득 차 있기에 심심하지 않다. 파도 소리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도 춘다. 저녁 먹으며 마신 알코올이 흥을 돋운다. 그때 친구가 외쳤다. ‘불멍’하자고.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모닥불을 보며 멍 때리는 것이 불멍임을….
빈 페인트 통에 주워온 마른 나뭇가지를 넣고 불을 피운다. 모닥불은 모두를 침잠하게 만든다. 나뭇가지가 타는 ‘딱딱’ 소리만 날 뿐 사방이 조용하다.
▶계곡에서 아침을 준비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망상해수욕장 오토캠핑장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안도현 시인의 ‘모닥불’ 시(詩)가 사방에 날아다닌다. 시인의 말대로 울음을 참아가며 모닥불을 바라본다. 가수 박인희의 노래 ‘모닥불’도 입에서 맴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쉽게도 별이 안 보인다. 약간의 비가 예보된 밤이다.
▶오토캠핑장에는 다양한 텐트와 야영 장비가 등장한다.
새벽비 맞으며 반가부좌 틀고 명상
내일을 위해 자야 한다. 한 친구는 차에서 잔다. 나머지는 텐트에서 잔다. 새벽에 ‘후둑후둑’ 소리가 난다. 가는 비가 텐트를 때리는 소리다. 한 친구가 반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져 있다. 벌써 20년째 아침에 한 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한다. 친구의 실루엣이 돌부처 같기도 하고, 위대한 명상가 같기도 하다. 비도 그치고, 새벽 바닷가의 비릿한 내음을 즐기며 산책을 한다. 한가롭다. 앞으로 삶도 이리 한가롭고 자유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은 간단히 라면을 끓여 해결한다. 텐트를 걷고, 출발이다. 망상해수욕장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양치질한다. 이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카페에 가서 푸른 바다를 보며 모닝커피를 마신다. 철 이른 해수욕장에 빈 의자만 보인다. 하지만 쓸쓸한 느낌은 안 든다.
▶망상해수욕장. 아침이라 한산하다
오늘은 깊은 계곡에서 야영이다. 친구가 선택한 야영지는 경북 봉화의 우구치계곡. 가는 도중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서 래프팅을 하기로 했다. 한 친구가 차 타고 가는 중에 전화를 하더니 금방 끊는다. 표정이 안 좋다. 아내에게 했는데 바로 끊더라는 것이다. 혼자 놀러 간 것에 대한 항의 표시다. 위로의 말을 건넨다. 돌이켜보니 2박 3일 동안 누구의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우리가 없어도 사회는 잘 굴러갔다. (젠장)
두 시간 반을 달려 동강 래프팅장에 도착했다. 물을 싫어하는 한 친구가 겁먹고 주저주저하다 아이들도 구명조끼를 입고 준비운동 하는 것을 보더니 용기를 낸다.
열 명이 탄 보트에는 여행 온 한 가족 삼대가 함께했다. 동강의 비경을 보며 때로는 위태롭게, 때로는 옆 보트와 물싸움을 하고, 때로는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며 세 시간에 걸친 래프팅은 지루하지 않았고, 막판 쉼터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무사 귀환을 축하했다.
보름달 아래 속마음 터놓고 ‘진실 게임’
▶망상해수욕장. 아침이라 한산하다
계곡에 도착하니 사방이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다. 물가에 텐트 치고 어항도 놓는다. 밤이 깊어간다. 마침 음력 보름 하루 전.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과 함께 보름달이 덩그러니 웃고 있다. 서로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진실 게임을 하며 추억을 쌓는다. 나이 먹고 진실 게임이라니….
새벽에 어항을 거두니 버들치 같은 물고기가 잔뜩 들어 있다. 작은 물고기는 놓아주고, 나머지 물고기로 손질해서 수제비 매운탕을 끓였다. 해장엔 그만이다.
한 친구가 새총 쏘기를 하자고 한다. 새총 쏘기 동호인인 그는 만 원씩 내고 10여m 떨어진 곳에 세워둔 빈 페트병을 세 번 쏘아 많이 맞힌 사람이 독식하자고 한다. 티타늄 금속으로 만들어진 진화한 현대식 새총은 가늠자도 있다. 경쟁은 항상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5년 경력의 그 친구를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2박 3일의 오토캠핑 놀이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2021년에도 모두 같이 놀러 가자, 친구들아.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