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요구와 미래 비전을 반영한 국가 발전 전략을 세우는 것은 역대 정부에서 늘 해오던 일이다.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등이 바로 그런 성장전략이다. 문재인정부에서 수립한 ‘한국판 뉴딜’도 중장기 발전 전략이라는 점에서 정책 구성이나 성격이 유사하다. 하지만 질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하나 있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두 축으로 성장을 꾀하되 고용 및 사회안전망 강화로 이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다. 한국판 뉴딜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키우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제·사회 구조 전반의 대전환까지 추구하는 정책 청사진인 셈이다.
고용·사회안전망 강화는 먼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당장 시급한 과제다. 코로나19가 불러온 경제위기가 노동시장의 취약계층과 경제적 약자들에게 집중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경제위기가 닥치면 취약계층이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위험에 노출된 계층의 생계를 보호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북돋우는 게 바로 고용·사회안전망이다.
“위기가 닥쳐도 누구 하나 낙오하지 않고 모두 상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극복했지만, 고용 불안과 함께 양극화의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위기는 곧 불평등 심화’라는 공식을 깨겠습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오히려 사회안전망을 확대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에서 한 말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이 5월 14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고용안전망 확대를 위한 예술인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정부가 그리는 안전망 구축 계획은?
불평등 없는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역점을 두는 과제는 전 국민 대상 고용안전망 구축이다. 현재 전체 취업자의 50% 남짓에 머물고 있는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2025년까지 사실상 ‘일하는 모든 국민’으로 단계적 확대하고,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가운데 현재 9개인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대상 직종을 14개로 늘린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예술인의 고용보험 적용을 위한 법안은 이미 국회에서 통과돼 2020년 12월 10일부터 시행 예정이고, 특고를 포함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도 연내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예술인과 특고는 고용주를 특정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해 정부는 이들에게 복수의 일자리에서 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득 감소 때문에 이직하는 경우에도 월평균 보수 60% 수준의 실업급여를 최대 9개월 동안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한다.
정부는 노사 단체 대표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고용보험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 내용을 토대로 2020년 말까지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로드맵’을 확정하기로 했다. 로드맵에는 고용보험의 단계적 확대 일정과 대상 취업자의 소득정보 파악 방식, 보험료 징수 방안 등이 담길 예정이다.
정부가 2025년까지 목표로 잡은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2100만 명이다. 만 15~64세 기준으로 2025년에 예상되는 취업자 수는 2500만여 명이다. 이 가운데 공무원, 직업군인, 교원 등 고용보험 적용 제외 대상을 빼면 2250만여 명이다.
따라서 고용보험 가입자 2100만 명은 전체 취업자의 약 95%에 이른다. 나머지 5% 안팎의 취업자는 근로장려세제(EITC)나 노란우산공제보험 등 다른 제도로 보호한다는 게 정부 복안이다.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안전망 기능
사회안전망 강화 방안으로 정부가 우선 추진하는 과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2022년까지 폐지한다는 것이다. 또 기준중위소득 산정 방식을 개편해 보장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8월 중순으로 예정된 제2차 기초생활보장종합계획 수립 때 반영할 예정이다.
또 2021년에는 정부가 ‘한국형 상병수당’을 도입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2022년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시범사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프더라도 생계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겠다는 게 상병수당 도입의 취지다. 노인·장애인에 대한 소득보장 지원 대상도 2021년부터 확대된다. 월 30만 원인 기초연금 최대지급액 지원 대상을 소득 하위 40%에서 전체 수급자인 소득 하위 70%까지로 늘리고, 장애인연금 기초급여의 최대지급액 대상도 장애인연금 수급자 중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서 전체 수급자(소득 하위 70%)로 확대한다.
고용안전망을 모든 취업자로 완벽하게 확대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확대하더라도 노동시장에서는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취업 경험이 없는 청년,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은 경력단절여성,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끝난 장기 실업자 등이 바로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이다. 이들에게는 ‘한국형 실업부조’로 불리는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안전망 기능을 한다.
2021년 1월부터 시행하는 국민취업지원제도에 따라 중위소득 50% 이하(청년은 120% 이하)의 저소득층 구직자는 고용보험 적용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로부터 최대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의 구직촉진수당을 받을 수 있다. 국민취업지원제도의 참여자들을 위한 일 경험 프로그램도 신설했다. 정식 취업 의사가 없이 무직 상태인 경우에는 공공기관이나 비영리단체(NGO)에서 한 달 안팎의 단기 직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체험형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고, 취업 의사는 있지만 희망하는 직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계층에는 희망 분야 민간기업에서 약 3개월 동안 직무 중심의 인턴형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또 ‘청년 디지털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민간기업의 정보기술(IT) 직무에 취직하거나 일 경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1인당 최대 6개월 동안 월 180만 원씩 지원하고, 중소·중견기업과 이공계 졸업생의 구인·구직 연결 서비스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자영업자·소상공인에 창업·재기 지원
고용보험 가입률이 낮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게는 창업 및 재기 지원을 강화한다. 2022년까지 신사업창업사관학교를 전국 17개로 늘려 신사업 분야 예비 창업자를 대상으로 교육, 점포 운영 실습과 상담, 사업화 자금 등을 묶음으로 지원한다. 영세 소상공인의 폐업 부담 경감 및 재도전 촉진을 위해 사업 정리·취업·재창업을 연계한 ‘희망리턴패키지’ 프로그램도 확대한다. 사업을 정리한 소상공인에게 무료로 취업 교육이나 업종 전환·재창업 교육을 제공하고, 성공할 경우 최대 100만 원의 전직 장려수당이나 1000만 원의 사업화 자금을 주는 제도다.
한국판 뉴딜은 불평등 사회에서 포용사회로 전환을 추구한다. 안전망의 강화는 포용사회로 전환을 위한 소극적 대응이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용 불안과 노동시장의 격차 확대는 안전망으로만 막을 수 없다.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을 위해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디지털·그린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할 사람 투자에도 집중하기로 했다. 우선 디지털 뉴딜을 선도할,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 핵심인재 10만 명 양성 계획이 큰 사업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AI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AI 대학원 지정을 확대하고, 박사급 인재의 산학 공동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지정한 ‘키우리(KIURI) 연구단’도 더 늘리기로 했다.
기존 산업계의 인력을 대상으로 한 AI·소프트웨어 활용 기술 교육도 강화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개발자 양성과 실무형 AI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이노베이션 스퀘어’를 전국 4대 권역별로 확충할 예정이며, 산업 현장의 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AI 역량 교육을 강화하고, 산업 영역별 전문인력 교육도 함께 추진한다.
포용 사회 전환 위해 사람에 적극 투자
그린 뉴딜을 이끌 융합기술 인재는 2만 명 양성이 목표다. 생물 소재, 녹색금융, 포스트 플라스틱 등 관련 분야의 특성화 대학원을 지정해 석·박사급 인재를 육성하고,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전문기술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고 우수기관을 선정해 모두 12개의 전문인력 양성과정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그린 뉴딜 분야의 주요 산업계에서 필요한 실무 인력이 쉽게 충원될 수 있도록 환경 분야 특성화 고등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정부는 직업훈련 체계 또한 한국판 뉴딜에 맞게 대대적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우선 신기술 분야의 ‘미래형 핵심 실무인력 18만 명 양성’을 위해 기존 직업훈련 기관이 아닌 혁신형 훈련기관이나 기업 또는 대학에 맡기기로 했다.
특히 AI 기반의 온·오프라인 연계 교육이 가능한 기관들의 직업훈련 진입을 촉진하고, 훈련 과정의 운영 및 성과 평가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한다. 직업훈련에 참여하는 모든 구직자와 재직자를 대상으로 훈련비 지원도 크게 확대한다. 디지털 융합훈련을 수강하는 모든 구직자에게 50만 원 상당의 디지털 화폐를 제공하고, 정부와 협약을 맺는 기업만 활용할 수 있는 전국 208개의 공동훈련센터를 단계적으로 지역별 전체 중소·중견기업에 개방해 산업 현장의 디지털 융합훈련을 활성화할 방침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안전망 강화와 사람에 대한 투자는 한국판 뉴딜의 성공과 포용적 혁신성장을 위한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원하는 때 원하는 일자리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관광 등 8개 업종 특별고용지원 업종 지정
한국판 뉴딜은 미래 비전에 맞춘 정책 과제 또는 사업이다. 정부는 코로나19로 당장 벌어진 고용 불안과 취약계층의 위기를 해소하는 정책은 따로 추진한다.
우선 2020년 2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고용안정 대책을 마련해 모두 추가경정예산(추경) 사업에 반영했다. 기업의 고용유지를 지원하기 위해 고용유지지원금을 휴업수당의 90%까지로 늘리고, 피해가 집중된 관광·공연업 등 8개 업종을 특별고용지원 업종으로 지정했다.
또 실직자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구직급여 지원 예산을 3조 4000억 원으로 늘리고, 특고·프리랜서·영세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을 위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신설해 지원 중이다. 6월 1일부터 신청 접수를 시작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은 7월 20일 마감 기준으로 신청자가 170만 명을 넘었다. 정부는 이 가운데 가구소득이 중위소득의 150% 이하면서 매출이 코로나19 이전보다 25~50% 즐어든 것을 증빙하면 3개월 동안 최대 150만 원까지 지원금을 제공한다.
민간의 고용 창출 능력이 당분간 회복되기 힘든 만큼 공공이 주도하는 공공·민간 일자리 57만 5000개 창출 사업도 중요하다. 공공에서는 비접촉 디지털 일자리가 11만 5000개, 취약계층 직접 지원 일자리가 30만 개다.
공공의 지원 또는 보조를 받는 민간 분야 일자리는 청년 디지털 일자리가 6만 개, 청년 일경험 일자리 5만 개, 채용보조금을 받는 중소·중견기업 일자리가 5만 개 등이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