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이 마침내 소금 결정체가 되며 흰 꽃으로 피어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은 신(神)의 영역일 것이다. 없음이 있음으로 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액체에서 고체를 뽑아내는 일이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하지만 인간의 일이 결코 아니다. 태양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짠 내를 품은 바닷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스며야 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소금을 ‘바다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표현했다.
‘꽃은 산이나 들에만 피는 게 아니라지요/ 바다에서도 피어나는 꽃이 있다지요/ 수차로 바닷물 퍼 올려 염밭에다 심어놓고/ 바람 좋고 볕 잘 드는 날이면/ 그곳에서 꽃이 피어난다지요/ 뭉게구름 같은 꽃이 둥실 피는 날이면/ 염부 김 씨는 한 마리 나비가 된다지요/ 꽃밭 위를 날아다니며 더듬이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을 보고 꽃묶음을 만든다지요/….’(강민숙 ‘곰소염전’)
여기에 인간의 땀과 정성이 침투해야 한다. 내리쬐는 태양 빛에 염부의 피부가 까맣게 타면 탈수록, 하얗고 질 좋은 소금이 태어난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이 합작한 소금은 소중한 인간의 재화가 됐다. 인간의 삶에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인식하며 살아간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소금이 인간에게 빛만큼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만든 지 70년 넘는 나무 소금창고의 외벽
볕 좋은 5~6월 최상의 소금 생산 시기
간단히 소금 만드는 과정을 짚고 넘어가자. 바닷물을 햇빛에 말리면 소금이 되지만 기다림과 숱한 땀이 있어야 한다.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둔다. 이때 바닷물의 염도는 25퍼밀(천분율의 단위로 1/1000을 뜻함). 저장지의 바닷물은 1차 증발지에서 염도 150퍼밀로 올라간다. 이 바닷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지고 염도가 250퍼밀로 올라간다.
2차 증발지에서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한다. 여름에는 2일, 봄과 가을에는 3일 정도 결정지에 머문 바닷물에서는 드디어 하얀 꽃이 피기 시작한다. 소금 성분이 엉기는 것이다. 이렇게 소금꽃이 피기까지 15~20일이 걸린다. 물론 그 사이에 비를 맞지 않아야 한다. 증발 과정에 비가 내리면 해주(海宙)라고 불리는 보관 장소에 바닷물을 모아놓았다가 햇빛이 나면 꺼낸다. 그러니 염부들은 하늘을 보고 산다. 마음을 졸이며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내리는 비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하리.
1년 중 4월부터 10월 사이에 소금을 만든다. 특히 햇빛이 좋고 비가 덜 내리는 5~6월이 최상의 소금 생산 시기다. 전북 부안의 곰소항은 젓갈이 유명하다. 곰소염전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곰섬, 범섬, 까치섬을 연결해 곰소항이 들어서면서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곰소염전은 무려 4대에 걸쳐 한 집안이 운영한다.
6월 23일 낮, 곰소염전을 운영하는 남선염업의 신종만(73) 대표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회식을 했다. 시골 수탉을 잡아 백숙을 만들어놓고, 곰소염전에서 나온 소금으로 절인 김치로 차린 소박한 회식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신 대표는 지난 5년간 소금 만드는 일을 배운 아들 신정우(34) 씨에게 과장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일반 사원에서 승진한 것이다.
드디어 자신이 3대에 걸쳐 운영해온 곰소염전이 4대로 이어지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온 아들은 다른 젊은이들이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소금 만드는 일을 묵묵히 했다. 고맙기만 하다.
▶2대에 걸쳐 염부 일을 하는 이강연 씨가 소금을 밀대로 모으고 있다.
소금 팔아 번 돈으로 중고등학교 설립
남선염업은 74년 전인 1946년, 신 대표의 할아버지(고 신원섭)가 설립한 염전이다. 그는 설립 초창기 염전학을 전공한 사람을 회사에 스카우트해 소금 맛을 좋게 만들었다.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직접 베어와 소금창고를 지었다. 그때 지은 소금창고는 고색창연하지만, 지금도 그 역할을 한다. 오랜 세월 거친 바닷바람을 이겨낸 나무 소금창고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남아 있다. 녹슨 자물쇠, 덧댄 합판, 삭아 내린 철판 구조물….
소금을 팔아 돈을 번 신 대표의 할아버지는 현재 부안여중, 부안여고를 세웠다. 교육사업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신 대표의 아버지(고 신동근)도 염전과 교육사업을 이었고, 신 대표를 거쳐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신 대표는 축산학과를 다니며 아버지를 도와 염전 경영을 시작했고, 염전이 한창 바쁠 때는 시험을 볼 수가 없어 따로 교수 연구실에 가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자신의 염전을 사진 찍기도 했던 신 대표는 사진 전시회를 열 만큼 사진에 조예가 깊다.
곰소 소금은 짜면서도 은근한 단맛을 낸다. 물론 나름의 비결이 있다. 간수를 제거하는 것이다. 간수는 습기가 찬 소금에서 저절로 녹아 흐르는 물이다. 간수에는 불소, 비소, 마그네슘 등이 포함돼 있어 버려야 한다. 곰소 소금 생산지에서는 한 달에 네 번 정도 간수를 뽑아서 바다에 버린다. 그래서 수확량이 다른 염전의 절반이다. 대신 다른 염전의 소금보다 비싸다. 남선염업의 간수 빼기 작업은 염전 설립 때부터 이어오고 있다. 다른 염전에서는 간수를 바닷물과 섞어 계속 재활용한다.
▶4대째 곰소염전을 운영하기 위해 일을 배우는 신정우 씨
관광 명소로 거듭나는 ‘한국의 우유니 호수’
5월 중순 만들어지는 송홧가루 소금은 곰소 소금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변산반도의 숲에서 날아온 송홧가루가 소금에 내려앉아 누런빛을 띠게 된다. <동의보감>에 소개된 송홧가루 소금은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 올리던 귀한 음식 재료였다.
애초 약 100만㎡(30만 평)의 염전 규모에 직원이 200여 명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약 50만㎡(15만 평)에 직원도 20명 남짓이다. 과거에 비해 염전 일이 현대화되고 기계화됐다. 소금도 컨베이어 벨트로 나르고, 염전 바닥도 친환경 세라믹 타일을 깔았다.
경영학을 전공한 신정우 씨는 염전을 관광 명소로 개발하려고 한다. 이미 곰소염전은 ‘한국의 우유니 호수’로 유명하다. 우유니는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 있는 건조 호수로,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고 불린다. 낮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투명하게 반사되고, 밤에는 하늘의 별이 호수 속에 들어 있는 듯한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곰소염전도 주변의 산과 푸른 하늘이 염전에 비치며 사진 동호인들의 단골 출사지가 됐다. 염전 속 맑은 바닷물에 비친 산과 하늘이 데칼코마니를 한 것처럼 선명해 어느 쪽이 실물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이날 염전에서 소금을 밀어내던 염부 이강연(47) 씨는 곰소염전에서 유일하게 2대에 걸친 염부다. 아버지 이정근(85) 씨가 62년 전 고향 영광에서 이곳으로 스카우트돼 일을 시작했고, 아들도 9년 전부터 이곳에서 염부로 일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아버지를 이어 염부 일을 한다. 이 씨가 이곳에서 일하는 염부 가운데 가장 막내. 대부분 염부들은 나이가 많다.
“염부의 정년은 없어요. 욕심내지 않고 노력만 하면 스트레스 없이 생활합니다.”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이 씨가 밀어서 모은 흰 소금이 어우러져 마치 사방에 함박눈이 온 것 같다. 한여름에 겨울이 찾아왔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