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리뷰
‘유진목의 성찰하는 마음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긴 글보다 짤막한 글이 더 가슴에 와닿을 때가 많네요. 마음이 편안하면 여유 있게 장편의 글도 읽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충족하고 있어 너무 감사한 코너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쉬지?’라는 글귀에 특히 공감이 갔는데요. 사실 저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거든요. 언뜻 생각만 했던 것인데 이렇게 글로 표현해주어 나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네요. 진심으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성숙 전남 광양시 광장로
‘은하계에 우리와 다른 36개의 외계 문명이 있고 광활한 우주에는 2000억에서 2조 개의 다른 은하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나’라는 존재, 인간이란 존재 그리고 지구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유한한지 새삼 깨달았다. 또한 광년! ‘빛의 속도로 1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라는 문장에서 광활한 우주공간을 시간적 개념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상상력 한계도 느꼈다.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문명이라 해도 외계 문명과 조우하면 인간은 경외감보다 두려움을 더 크게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고 유한한 지구 안에서도 인간은 공존보다 전쟁과 배타의 역사를 만들었고 지금도 별다르지 않으며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공존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신현철 경기 용인시 기흥구
사진 공감
서울 용산구 오래된 건물 옆벽에 안이 파인 곳이 있네요. 근무하는 사무실 2층에서 바로 보이는 저 벽에 어느 날 비둘기 두 마리가 와서 살더군요. 무심코 보고 있는데 마치 죽은 듯 30분을 꼼짝 않고 있더니 또 한 마리가 날아와 교대하는 순간, 그 아래 저렇게 알이 보였어요. 자연 속에서도 아니고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본 저 모습이 참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홍정미 서울 금천구 독산로
오랜만에 고향 울산에 내려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울창한 대나무 숲길을 걸으며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와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 치유(힐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처럼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맘껏 마시며 사색과 명상에 잠기는 좋은 기회였죠. 이런 산책 공간이 전국 곳곳에 조성되어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우도형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아름다운 우리말
▶게티이미지뱅크
선조, 한글로 민심의 회복을 꾀하다
1592년 4월 14일, 경복궁에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왜군이 한양 성안 가까이 쳐들어오자 임금인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을 떠나려 했는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내탕고(內帑庫, 조선시대 임금의 개인적인 재물을 넣어두던 곳간)에 들어가 왕의 보물을 약탈하고,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 조선시대에 법률·소송·형옥·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불태운 것이다. 그 후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에 연이어 불을 질렀으니, 이는 백성을 버린 조정의 위엄도 함께 매몰되어 불태워진 참담한 사건이자 조정에 대한 백성의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왜군을 격퇴하고 이순신과 권율이 각지에서 활약하면서 어느 정도 왜란이 진압되는 듯 보이자, 1593년 9월 선조는 한양으로 귀환을 준비하며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를 내렸다. 유서(諭書)는 임금이 내리는 명령이다. 선조는 ‘선조국문유서’에서 왜군에 투항해 왜군을 돕기까지 했던 경상도 남부의 조선인 포로에게 그 죄를 묻지 않고 벼슬을 내리겠으니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라고 회유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유서를 임금이 친히 ‘한글’로 썼다는 점이다.
선조는 잃어버린 백성의 신뢰를 되찾아야 했다. 선조는 백성들이 왜적의 포로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백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말을 서두에 넣어 왜적에 투항한 포로들에게 죄를 묻지도 않을 것이며 공을 세웠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유서 말미에서는 전혀 의심하지 말라고 달래면서 지금 나오지 않으면 후에 왜적에게 죽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곧 나라가 왜군을 소탕할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최대한 많은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 선조는 자신의 뜻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수단, 즉 한글을 사용했다.
장수 권탁(1544~1593)은 김해성을 지키던 중 선조의 유서를 접하고 적진에 숨어 들어가 수십 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인 포로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권탁은 결국 목숨을 잃는데,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선조의 유서가 그의 가문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선조국문유서’가 현대에 이르러 보물 제951호로 지정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왕이 한글로 쓴 명령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조정이 백성과 소통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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