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처럼 아름답다

2020.07.06 최신호 보기

▶영국의 대표적인 픽처레스크 양식의 정원인 버킹엄셔의 스토우 가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풍경을 보고 감동받았을 때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을 음미해보면 재미있다. 화가는 풍경을 보고 감동받아 그것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그렇다면 그 실제적인 풍경이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것을 연필이나 물감으로 재현한 것은 모방이므로 원래의 풍경보다 미흡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떠한 경우에도 모방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에서는 실제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할까?
자연 그대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무질서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시야는 무작위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대상을 본다. 그냥 걷다가 바라보는 자연(여기에는 꼭 대자연이 아니더라도 도시나 사람의 모습도 포함된다)은 정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화가가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먼저 프레임을 정한다. 4각의 틀 안으로 특정 장면을 포착하고 안정되게 구도를 잡아 질서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덜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을 제외한다. 심지어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화가의 마음대로 빼버릴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 대상을 왜곡해서 어떤 미학의 기준에 맞게 재조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림은 실제 대상보다 훨씬 아름답게 승화한다. 결국 그런 이미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나 인공의 도시, 사람을 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폴로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프시케의 아버지’, 클로드 로랭, 1663년

고전적이고 이국적이고 극적인 특징
클로드 로랭이라는 17세기 프랑스의 화가는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꿈같은 풍경을 그렸다. 로랭의 풍경화는 사람들에게 미학적 기준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실제 풍경을 보고 로랭의 풍경화에 견주어 그것의 아름다움을 판단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건축가들은 로랭의 풍경화를 흉내 낸 건축물과 조경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로랭은 대자연과 고전주의 건축물이 어우러진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건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숲이나 해변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신전 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건축가들은 이것을 모방해서 나무와 풀이 울창한 숲속에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집’을 지었던 것이다. 이를 픽처레스크(Picturesque) 양식이라고 부른다. 가수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의 유명한 가사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라는 말은 건축과 그림에 대한 이런 관념과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때 집은 가능한 한 고전적이고 이국적이고 극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냥 평소 도시에서 보던 건축물과는 좀 달라야 하는 것이다. 평소 익숙하게 봐온 집의 형태에서는 감동도, 재미도,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픽처레스크 양식에서는 고대 신전이나 중세의 성과 고딕 성당, 아니면 아예 시골의 오두막을 흉내 낸다. 픽처레스크 양식은 교외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자들을 위해 전원 속 낭만적 정원과 건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양식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특히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영국에는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었다. 산업도시로 발전하는 복잡한 도시, 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공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픽처레스크 양식이 유행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산업화된 도시를 떠나 한적한 교외에서 한가로운 삶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겠는가.
픽처레스크 건축과 정원은 분명 서양에서 나타난 양식이지만, 한국이라고 그러한 경향과 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건축물을 통해 어떤 이국성과 낭만성을 추구하고, 기능과 무관하게 겉모습으로 그런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무수히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이미지를 보면서 이미지 속의 어떤 대상을 동경하고 욕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물론 여기에서 그 대상은 평소 봐오고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아주 머나먼 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고, 그곳에서 사는 꿈을 꾼다. 마치 미국인들이 유럽의 오래된 성을 동경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듯 한국인들도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서양의 건축물을 동경하고 그것에 자신을 투사해본다.

▶이 양옥주택의 대문은 이것저것을 절충해 어느 나라에도 없는 양식으로 거듭났다.

몰취향에도 아름다움 부여하는 자연
아파트 이름에 ‘맨션’이나 ‘캐슬’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태도가 바로 픽처레스크 양식의 건축물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웨딩홀과 모텔을 중세의 성을 모방해 짓는 것을 나는 ‘한국식 픽처레스크 양식’이라 부르고 싶다. 원래 기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형태가 하나의 양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초가집이나 한옥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한국의 기후와 생활양식에 맞게 만든,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 이후 재료와 기술이 발전하자 외국의 양식을 한국에서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림(또는 사진)에서 본 듯한 아름다움을 구체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유행한 ‘문화주택’이나 1970년대 짓기 시작한 ‘양옥주택’이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진 속에서 본 서양의 그림 같은 집을 우리식으로 번역해 양식화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양옥을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욕망이 만들어낸 몰취향의 건물로 미워했다. 최근에는 이런 건물에서 향수를 느끼고 그런 건물에 들어가면 편안함마저 든다.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진 양옥도 이제 세월의 때와 함께 멋이 깃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일종의 폐허 취향처럼 오래되어 미적으로 용서를 받은 듯한 느낌이랄까? 자연이란 몰취향의 건물에조차 기회를 주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말은 화가가 의도적으로 질서를 부여한 대상을 자연보다 우위에 둔다.
하지만 인공적인 사물은 그 의도적인 질서의 부여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떤 낯섦과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것조차 상쇄해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건축에 무지한 집장사가 지은 건물도 고색창연해지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 자연을 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생각도 없으리라.

김 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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