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이 5월 14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고용안전망 확대를 위한 예술인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고용보험 새로 편입 예술인들 목소리
2020년 6월 9일, 예술인인 피보험자에 대한 고용보험 특례 규정이 신설됐다. 고용보험 대상에 예술인을 추가한 ‘고용보험법’ 및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개정안이 5월 20일 국회를 통과하면서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가 전면 도입된 것이다. 2009년 ‘예술인 복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것까지 보면 약 10년 만에 이뤄진 결실이다.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예술인들은 이제 고용보험이 당연 적용되고, 실업급여와 출산전후 휴가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첫발을 뗀 예술인 고용보험, 다양한 분야(장르)가 공존하는 예술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고 현장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음악, 출판, 무용, 공연, 영화 등 다섯 분야의 예술인 목소리를 들어봤다.
가난한 예술가에게 고용보험은 큰 안전망
6월 12일 ‘불금’ 저녁, 서울 영등포시장 골목 어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뮤지션유니온,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소속 사람들이다. 문화예술 단체들의 연대체인 문화예술노동연대에서 마련한 포럼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이날 포럼 주제는 ‘예술인 고용보험법 그림의 떡으로 전락할 것인가, 실효성 있는 법이 될 것인가?’였다. 꽤나 의미심장한 제목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문화예술인들에게 하나의 숙원 사업이었던 ‘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이 반갑지 않은 것일까?
“처음엔 답답한 마음에서 시작됐다. 예술인은 법을 잘 모르고, 정부는 예술인 현장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10년 동안 차츰차츰 논의가 깊어지며 여기까지 왔다.” 뮤지션유니온 고용보험TF팀장과 문화예술노동연대 고용보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22년 차 음악가 이씬정석 씨의 말이다. 그는 “반가운 소식이다. 특히 6개월 안에 시행되는 것도 기쁘다. 빨리 시행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생계가 어려운 예술인들에게 빨리 혜택이 돌아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소속인 박성혜 무용평론가는 “예술계의 기대치가 굉장히 크다. 사회안전망 안에 드디어 예술인이 들어왔다. 특히 일감이 없는 시기, 가난한 예술가에게 고용보험은 큰 안전망이다. 유사한 제도가 있는 프랑스가 부러웠던 이유다. 한국이 아메리카주와 아시아 지역에선 첫 도입”이라며 반가움을 더했다. “생계 긴급지원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예술성과 전문성을 공인받은 것에 대한 기쁨도 있다. 예술인들의 자부심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며 무용계의 색다른 반응도 전했다.
연극계도 대다수가 환영하는 분위기다. 경력 27년 차 연극배우이자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이종승 위원장은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가 도입되면 계약금 일부를 토해내는 ‘페이백’ 관행이 사라질 것이다. 또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되면서 임금체불도 줄고, 계약서가 있으니 피해보상도 쉽게 받을 수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예술인도 노동자’란 사회적 인식 필요
그렇다면 많은 예술인이 반기고 있는 ‘예술인 고용보험법 적용’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이씬정석 뮤지션유니온 고용보험TF팀장은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예술인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노동=육체노동’ 혹은 ‘노동자=하위 계층’이란 인식이 여전하다”며 노동의 범주를 예술까지 넓게 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 점이 예술인 고용보험이 특례 규정으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다. 박성혜 무용평론가도 같은 의견을 내놨다. “같은 노동자인데 예술인은 베짱이로 본다. 예술은 등 따습고 배부른 신선들의 놀이가 아니다. 이건 일종의 공공재원이다”라며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또 다른 이유로 이씬정석 팀장은 “관련 법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현장의 예술가 목소리가 올곧게 전달되지 못했다. 법안을 심의하는 고용보험위원회에 예술인은 단 한 명도 포함돼 있지 않다”며 타자화·대상화된 정책을 아쉬워 했다.
이종승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위원장은 반가움과 함께 “이렇게 통과될 줄 몰랐다”며 당혹감도 내비쳤다. “2020년 초까지 묵묵부답이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급격히 진행된 경우”라고 답했다.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 4월 30일부터 5월 14일까지 15일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코로나19 이전에도 생계를 위한 공연 외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외 수입원(일반 노동)의 일이 끊겼냐는 질문에는 79%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로 무대에 오르지 못한 피해까지 더하면, 공연예술인의 경제적 피해는 막대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 국민 고용보험’의 방아쇠를 당긴 이유와도 연결된다.
소수의 예술인만 혜택받을까 걱정도
예술계는 환영하면서도 우려 또한 적지 않다. 최은실 공인노무사의 발제로 이날 포럼이 열린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통과된 예술인 고용보험법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개선되어야 할 지점들, 최대한 많은 예술인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시행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성되어야 할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먼저 예술인 고용보험법의 큰 골자를 들여다보자. 고용보험을 적용받는 대상은 ‘예술인 복지법’에 따른 예술활동 증명서를 발급받거나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체결한 자유계약(프리랜서) 예술인(1개월 미만의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맺은 단기 예술인 포함)이다. 다만, 65세 이상 및 일정 소득 미만인 예술인은 가입이 제한된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24개월 중 피보험 단위기간 9개월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또 임금노동자와 동일하게 중대한 귀책사유에 의한 해고, 피보험자의 자발적 이직 등의 경우에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실업급여의 지급 수준은 이직 전 12개월간 보험료 산정의 기준이 된 보수총액을 해당 기간의 일수로 나눈 기초일액의 60%이며, 하한액은 고용노동부 장관이 고시한 기준보수의 60%가 실질적인 하한액으로 적용된다. 실업급여 지급기간은 피보험 기간과 연령에 따라 120~270일로 임금노동자와 동일하고, 노동자의 출산전후 휴가급여에 준하는 출산전후 급여도 받을 수 있다.
최은실 노무사는 ‘시행령 싸움’이라고 단정 지었다. 우선 “당연 적용의 대상으로서 예술인이 어디까지인지 대통령령으로 정할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피보험 단위기간인 9개월에 대해서도 “다른 업종을 겸업하는 예술인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여건이 엄격하다는 인상”이라고 밝혔다.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는 “최소한의 생계 대책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인 고용보험이 실질적 효과를 낼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우려했다. 이유에 대해 “핵심 사항들을 모두 대통령령으로 미뤄두어 추후 시행령의 내용에 따라 이 법이 예술인에게 득이 될지, 소수의 예술인만 혜택받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될지 정해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현장 예술인들로 구성된 TF 요구
포럼 자리에서는 예술계 각 분야의 다양한 쟁점이 언급됐다. “출판은 저자 외에 모든 노동자들이 예술활동 증명 범위 안에 없다. 외주 편집자, 번역가, 책 디자이너, 삽화가 등은 예술인도 노동자도 아닌 ‘특고’ 처지와 다름없다”며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조합원이기도 한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대표는 “시행령에서 예술활동 증명 기준을 낮추거나 고용보험 예술인 적용 범위를 넓혀달라”고 요구할 생각이다.
대부분이 1인 사업자인 대중음악 예술인은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영세 예술인에게는 보험료 50%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해주는 법안도 같이 통과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음악가 이씬정석은 “사용자나 고소득 음악인은 물론이고 사용자 상당수도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창작 작업만 하는, 제작하면서 창작도 하는, 방송에 출연하는 등 음악활동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활동의 내용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또 이를 시간으로 할지 기간으로 할지 등 유독 힘든 게 음악 쪽”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박성혜 무용평론가는 “일감이 줄어드는 40대 이후 무용수들이 수급 조건을 넘길 수 있을까? 정량평가로 인해 비켜날 위험이 있다. 이 판에서 20, 30년간 버틴 대가들인데 이들을 위해 어떻게 추가적인 장치를 만들어나가야 할까”가 큰 고민이다.
연극인 이종승은 “공연 일수만 갖고 계산하면 산정 범위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힘들다. 계약서에 연습 기간도 포함해줘야 한다. 특히 행사나 축제 같은 단발성 공연은 연습 기간을 어느 정도 인정해줄 것인지가 관건”이라며 연극계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이상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은 “일수 계산 말고 ‘수익’ 기준은 어떨까. 연기자의 경우 며칠 일하고 꽤 높은 수익을 가져간다. 음악가도 1, 2회 공연으로 한 달 치 수익을 가져갈 수도 있다. 기간 중심에서 수익 중심으로 논의를 바꿔보면 어떨까 싶다”며 새로운 지침을 제안했다.
각 분야별 다양성을 반영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술인들은 “현장에서 시행령 작업에 꼼꼼히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한목소리로 “현장 예술인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 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요구한다. “지켜보겠다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이자, 예술인 고용보험의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절실함이다. 예술인의 더 나은 미래가 그려진다.
심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