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누구에게든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방어하고 물리치려면 각자도생의 분열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한 연대와 집중의 힘이 필요하다. 든든한 국가 방역체계와 의료시스템은 바로 이런 힘에서 나온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고용 충격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잃거나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고용 위기는 국민 모두의 생계를 위협한다. 코로나19가 초래한 고용위기는 감염병의 확산만큼이나 무서운 사회적 재난이다. 고용 악화는 3월부터 임시직과 일용직, 소상공인과 자영업, 관광·서비스업 등에 집중돼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경제 위축으로 고용 위기의 확산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신속하고 과감한 대응 방안이 나와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와 민관협력도 절실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는 실직의 공포를 ‘경제 전시 상황’으로 규정하며, 고용위기 돌파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고, 한국형 실업부조 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의 조속한 시행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불평등을 줄이는 사회안전망은 고용안전망 구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지금의 위기를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고용시장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전 국민 고용보험에 대해 사회 각계의 의견을 들어보고, 코로나19 이후 고용 질서의 변화를 전망해본다.
박순빈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4월 29일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노사 상생협력에 기초해 고용을 유지하는 사업장인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현장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정 부| “건강보험처럼 전 국민 고용보험 필요”
|도입론| “고용 불안정성에 효과적 대응 되도록”
|신중론| “보험료 산정 어렵고 도덕적 해이 우려”
경제학자 32명에게 묻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전 국민 고용보험이 뜨거운 의제로 등장했다.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취업자들이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모든 취업자가 고용보험 혜택을 받는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고 선언했다. 예술인·특수형태고용(특고) 노동자·플랫폼 노동자(노무 제공자가 사용자에게 종속되지 않은 자영업자)·프리랜서 등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자영업자들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대”하자는 단계론이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경제활동인구 2700만여 명 중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무려 1200만여 명이다.
“동의한다” 48 vs “동의하지 않는다” 39%
전 국민 고용보험이 뜨거운 의제로 나온 가운데 국내 저명 경제학자들에게 전 국민 고용보험에 대해 물었다. 6월 10일 한국경제학회 경제토론의 고용보험 확대 필요성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현재 상황에서 전 국민(경제활동인구) 고용보험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제에 경제학자 32명 중 48%(‘강하게 동의함’ 13% 포함)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9%였고, 확신이 없다는 답은 13%였다. 고용보험 확대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그 이유로 ‘고용 불안정성이 커졌다’(45%), ‘재난에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 있어서’(9%) 등을 꼽았다. 반면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보험료 산정의 어려움과 도덕적 해이’(44%), ‘재정 악화 우려’(33%) 등을 반대 이유로 지목했다.
‘강하게 동의한다’는 답을 선택한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경제학자들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상시적인 산업 구조조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의 전제 조건이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라는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19로 구조조정이 시작된 자영업자들이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고용보험으로 지원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현철 미국 코넬대 교수는 “자영업자 비율이 25%가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5위인 한국에서 더욱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용보험을 고용주에게 고용됐다고 보기 어려운 이들에게까지 확대하면 사실상 다른 근로자들이 그 부담을 메우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현재 고용보험기금의 재정 상황 악화를 고려하면 재정 부담이 상당히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6월 13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 실업급여 창구에서 실업급여 신청자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 한겨레
전체 취업자 절반가량만 고용보험 가입
한국경제학회에 따르면 2월 현재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대부분의 임금근로자와 소수의 자영업자를 포함해 약 1382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433만 명)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자발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자영업자는 전체 570만 명 가운데 0.4%만 고용보험에 든 상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을 달성하려면 대리운전 기사, 배달 기사 등 특수고용직과 대부분의 자영업자를 비롯해 약 1000만 명을 추가로 고용보험에 포함해야 하고, 이들의 특수성을 고려해 보험료율을 산정해야 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실업 상태가 된 사람에게 구직활동을 전제로 실업급여와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정규직·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자영업자 등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던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 목표다. 일하는 모두가 의무가입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용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소득과 이윤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보험료 납부가 어려울 정도의 취약계층은 정부가 보험료를 절반 이상 지원하거나, 정부 재정으로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방식이 도입될 수 있다.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면 사회안전망의 보편성을 갖춘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설득력이 약해진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기본소득을 생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매달 지급한다면 전 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할 필요가 없어 원칙적으로 두 정책이 공존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주장이 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본소득 대신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재원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9년 실업급여 지출액은 총 9조 3355억 원, 1인당 실업급여 수급액은 최저 월 160만 원에서 최대 198만 원이다. 2월 기준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약 1382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433만 명)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지금보다 예산을 두 배로 늘리면 전체 취업자로 고용보험을 확대하고 보험료 지원정책도 강화할 수 있다. 양 교수는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추가 비용인 9조 3355억 원을 기본소득으로 5200만 명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월 1만 4900원이 된다. 사각지대는 해소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198만 원인 실업급여 최고액을 300만 원까지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처럼 생계의 어려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없도록 최저임금 수준인 실업급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기본소득이 들어올 경우 사회보장 강화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양 교수의 견해다.
고용보험과 기본소득은 양립 가능한가?
두 제도를 대결구도로 볼 필요가 없다는 입장도 있다.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우선에 두고, 보조적으로 부분 기본소득을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양립 가능성은 기본소득을 어느 수준에서 결정하느냐에 달린 문제”라며 “아동수당과 기초연금, 청년수당 등 복지국가의 보편적 수당과 같은 성격의 부분 기본소득이라면 전 국민 사회보험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 9일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빠르게 해소해야 한다”며 “지금의 위기를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는 계기로 삼아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이같이 밝히고 “특수고용 노동자의 4대 보험 적용 확대 등 취약업종 보호 노력을 강화해달라”고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위기는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에게 특히 가혹하다”며 “코로나19 사태로 임시직, 일용직, 특수고용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에 고용 충격이 집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상생하지 못하면 진정한 위기 극복이라고 할 수 없다”며 “한국판 뉴딜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다”고 거듭 밝혔다.
무엇보다 사회안전망은 고용안전망 구축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일자리가 최고의 사회안전망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는 취약계층 55만 명에 대해 긴급 일자리 창출에 직접 나서고 있다”면서 “실직자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부여해 복지비용 지출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위기를 극복하려면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하다”며 “서로 조금씩 양보해 모두가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곧 닥칠 고용충격 대비해 제도개선”
청와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의제로 ‘전 국민 고용보험 확대’를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은 5월 1일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연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정치 지형의 변화’라는 정책 세미나에서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전 국민 건강보험이 숨은 공로자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라며 “건강보험처럼 전 국민 고용보험을 갖추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대량 실직 등이 현실화되고 있지만 자영업자나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등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1000만 명이 넘어 이들을 위한 안전망 확충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정부에서도 힘을 싣는 목소리가 나왔다. 강 수석의 발언 이튿날인 5월 2일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페이스북에 “위기는 혁신을 부른다. 그리고 불가능한 대타협의 시간이기도 하다”며 “우리도 곧 들이닥칠 고용 충격에 대비해 하루빨리 제도의 성벽을 보수해야 한다”고 제도 개선 필요성을 언급했다.
고용안전망 강화는 문재인정부의 역점 과제다.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선정한 100대 국정과제에는 예술인과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대상인 특수고용 노동자부터 단계적으로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