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일 씨가 무공훈장을 받은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임영일 씨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임영일 씨
3월 12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영일(90) 씨의 자택에서는 의미 있는 무공훈장 수여식이 거행됐다. 코로나19 탓에 공개 장소에서 축하받지는 못했지만 학도병 출신 임영일 씨가 1950년 임시 훈장수여증서를 받은 지 무려 70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다. 임 씨는 “무공훈장을 끝내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죽기 전에 받게 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임영일 씨는 당시 받은 임시 훈장수여증을 분실한 상태였다. 상훈 기록에도 이름만 남아 있고 군번이 적혀 있지 않아 확인하기 쉽지 않았지만,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조사단)의 노력으로 무공훈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사단은 6·25전쟁 당시 훈장 수여가 결정됐지만 실물 훈장과 증서를 받지 못한 군인과 유가족을 찾아 무공훈장을 전달하고 있다.
임영일 씨는 1950년 9월 경북 영천지구 전투에 참전 중 발바닥에 관통상을 입는 부상을 당했다. 그는 육군 원호대로 이송돼 그해 12월 원호대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주어진 것은 명함 크기의 임시 훈장수여증서뿐이었다. 전쟁 중이어서 금속 재질의 훈장을 만들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훈장증서도 없었다. 당시에는 대다수 인원에게 상훈명령만 발령하고 임시 수여증서를 전달했다.
“아버지 살아생전 무공훈장 찾아 기뻐”
아들 임래웅(49) 씨는 몇 년 전부터 부친의 무공훈장을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2~3년 동안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거의 포기 상태였다. 임 씨는 “아버지가 이미 국가보훈처 심사를 통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무공훈장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전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입증하기 어려웠다”며 “우연히 인터넷에서 ‘6·25무공훈장찾아주기’를 알게 돼 조사단에 전화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무공훈장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 살아생전에 무공훈장을 찾아 기쁘다”고 말했다.
조사단에서도 임영일 씨가 무공훈장을 받은 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임 씨의 군번을 조회해 거주표에 입대일과 전역일, 육군 원호대 후송기록 외에는 기재된 내용이 없음을 확인했다. 임영일 씨 이름으로 검색한 상훈 명부에는 같은 이름의 훈장 미수여자가 두 명 있었지만, 한 사람은 훈장 수여 당시 계급이 달랐고 다른 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군번이 기록돼 있지 않았다.
조사단은 임영일 씨와 전화 인터뷰로 당시 전투 상황을 진술받았다. 임 씨의 진술은 전사에 기록된 당시 전투 상황과 거의 일치했지만, 소속 부대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부대 이름을 알지 못했고 당시 전우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학도병들은 당시 필요에 따라 부대에 배치되면서 소속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고 70년이 지난 옛일을 정확히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임영일 씨가 군번 없는 무공훈장 대상자 본인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임영일(가운데) 씨가 3월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육군과 광산구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공훈장수여식을 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조사단
당시 부대장과 전투 상황 정확히 기억
인터뷰 중에 무심코 나온 부대장 ‘강인노’라는 이름이 무공훈장 당사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임영일 씨는 비록 부대명은 몰랐지만 고향이 북한인 강인노 씨가 부대를 탁월하게 지휘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원호대에서 영천지구 전투의 전공으로 여러 명의 동료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도 진술했고 강인노 부대장 소속 부대가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사실도 들었다고 했다.
조사단은 강인노 씨를 실마리 삼아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갔다. 당시 강 씨 관련 상훈 기록과 임영일 씨의 증언 내용을 비교했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쟁사·학도의용군사 등을 심도 있게 검토했다. 학도의용군사와 전쟁사 등에 따르면 호남 지역에서 모집한 학도병들이 7사단에 재편돼 포항과 영천지구 전투에 투입됐으며, 이후 평양 진격작전을 수행했다. 또 원호대에서 다수 인원이 임시 수여증서를 받았고, 지휘관 강 씨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확인했다. 화랑무공훈장이 4등급이라면 을지무공훈장은 2등급에 해당한다.
박창남 조사단 총괄·기획장교는 “강인노 씨를 찾아보니 실존 인물이었다. 6·25전쟁 때 대대장과 부연대장을 역임하고 나중에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며 “강인노 씨의 기록과 임영일 씨가 진술한 당시 전투 상황이 맞아떨어져 임 씨가 무공훈장을 받지 않았다고 믿을 증거는 없었다”고 말했다.
임영일 씨는 6·25전쟁 당시 특히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한 사람은 탁월한 지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한 사람은 그가 발목을 자르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제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임영일 씨는 갑작스럽게 전쟁에 투입된 학도병 출신으로 적응이 쉽지 않았다. “당시 중학교(현재 고등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총을 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모두 군에 차출됐다”며 “영천지구 전투에서도 학도병의 절반 이상이 죽어나갔다”고 회고했다.
‘영천지구 전투’ 승리로 반전 계기 마련
임영일 씨는 당시 지휘관 강인노 씨에 대해 “그는 경험이 많고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하며 경북 영천지구에서 벌어진 한 전투 장면을 소개했다. 후퇴 명령이 내려와 부대가 영천읍에서 인근 면으로 이동했는데, 강 부대장이 면사무소와 학교 등을 비워두고 뒷산에 부대원을 매복시켰다. 이후 면사무소 등에 자리 잡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북한군을 상대로 기습적으로 집중포화를 쏟아부어 대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우리가 작은 부대라는 사실도 모르고 도망가기 급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영천지구 전투’는 1950년 9월 6·25전쟁 당시 대구·경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2군단을 격퇴해 영천을 확보한 전투다. 한국군은 이 전투에 승리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고 향후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임영일 씨는 당시 간호장교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 군의관(대위)은 총알에 관통당한 발바닥이 낫지 않자 다리를 잘라내면 더 빨리 낫는다며 절단하려고 했다. 임 씨는 간호장교(소위)에게 군의관을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임 씨를 가엽게 여긴 간호장교가 군의관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온전한 다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임영일 씨는 참혹한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가슴속에 간직했던 꿈은 포기했다. 6·25전쟁 직전 의대 진학을 준비하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경상도 지역에서 한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발바닥이 관통당하는 부상을 당한 데다, 전쟁 와중에 낯선 타향에 정착하며 꿈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이찬영 기자
6·25 당시 6사단 19연대 장병들 인물화 주인공 10명을 찾습니다
국방부가 진행하고 있는 ‘우주선(우리가 주는 선물) 프로젝트’는 6·25전쟁 당시 훈장 수여가 결정됐으나 긴박한 상황으로 실물 훈장과 증서를 받지 못한 5만 6000여 명과 유가족을 찾아주는 운동이다.
2019년 ‘6·25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육군인사사령부에 6·25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이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 한시법으로 제정돼 2022년까지 무공훈장 수여자를 찾아야 한다.
대상자 명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 누리집에 공개됐으며 행정안전부, 국가보훈처, 병무청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자들이 이미 90대를 넘었고, 1950년대 병적 자료와 제적 서류로는 그들의 현 소재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조사단은 군부대와 지방자치단체가 연계한 ‘내 고장 영웅 찾기 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예비군 지휘관과 지자체 등에 대상자 명단을 배포해 공로자를 찾은 뒤 이를 조사단에서 최종 확인한다. 무공훈장 수여 행사는 책임 지역 군 지휘관과 지자체장이 주관하고 있다.
조사단은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의 작가 고 김성환 화백이 6·25전쟁 당시 그린 인물화의 주인공 10명도 찾고 있다. <국방일보>에 공개된 인물화는 김 화백이 6·25전쟁 당시 종군 활동을 하며 그린 육군 6사단 19연대 장병들이다. 소재가 파악된 이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인물화 사본을 전달할 계획이며, 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됐지만 받지 못한 3명에게는 무공훈장도 수여한다.
김 화백은 1951년 10월 최전방에서 종군 활동을 하면서 공적이 뛰어났던 6사단 장병들을 대상으로 인물화를 그렸다. 당시 국방부 정훈국과 육군본부 휼병감실, 정훈감실에 소속된 그는 현장에서 우리 군의 모습을 직접 그림과 글로 기록했다.
이 인물화는 2017년 육군군사연구소 김상규 박사가 김 화백을 만나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김 박사는 그림의 주인공과 유가족에게 인물화 사본을 전달하면 의미가 클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김 화백은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주인공 찾기는 난항을 겪었고 김 화백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2019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