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사진: 유서프 카슈, 1960년
이른바 인스타그램 영향력자(인플루언서)들의 특정 사진을 보고, 이것이 과연 사진인지 그림인지 의심이 갔다. 어떤 여성은 정말 인형 같은 얼굴, ‘리얼 인형’이라 부르는 얼굴과 몸매를 자랑한다. 어떤 남성은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에 미소년의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다. 이건 정말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이 아니던가. 이런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가상 세계의 등장인물(캐릭터)이 실제 사람을 모방한 건지, 아니면 사람이 가상 세계를 거꾸로 모방한 건지 헷갈린다. 이처럼 실제와 이미지는 서로를 모방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모방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즉 이미지는 언제나 실제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지와 실제의 차이는, 이미지는 어느 한순간을 포착한 것인 반면 실제는 연속적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실제 삶 속의 연속성 중에서 어느 한순간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 한순간이란 어떤 순간일까? 만약 그 이미지가 인물이라면 그 인물의 본질이 드러난 순간이라고 흔히 말할 것이다. 또는 거창하게 ‘그의 영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지섭이 모델로 등장하는 소니 카메라 광고의 문구는 “영혼까지 담는 풀프레임’이다. 이 광고 문구에서 우리는 인물 사진이 그 인물의 영혼을 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얼굴의 순간이란 무엇인가
거창하게 영혼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인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고자 할 것이다. 사람마다 아름다운 얼굴의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얼굴의 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서 어떤 순간을 공간적으로 바꿔 말하면 어떤 특정 시점을 의미한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거리와 다른 각도로 보게 된다.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조금 멀리서 보기도 한다. 정면을 보기도 하고 측면을 보기도 하고, 비스듬한 각도로 보기도 하고, 약간 밑에서 보기도 하고 약간 위에서 보기도 한다. 그렇게 수많은 거리와 각도에서 보는 얼굴들 가운데 딱 하나의 거리와 각도에서 본 것이 바로 순간의 시점이다. 그런 순간의 시점 중에서 사람마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거리와 각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사람마다 얼굴에 어떤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턱이 너무 크다고 여기는 사람은 낮은 각도로 촬영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코가 잘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코가 강조되는 각도로 찍히길 원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마다 ‘얼짱 각도’라는 것이 선정된다. 줄기차게 그런 각도의 얼굴로 이미지를 만들려 할 것이다. 결국 그런 이미지는 실제의 연속성에서 한순간을 얼음처럼 얼려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이처럼 실제의 연속성이 사라지는 만큼 정보가 축약될 수밖에 없다. 연속적으로 보는 얼굴과 사진처럼 한순간을 포착한 얼굴은 정보의 양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유서프 카슈가 촬영한 존 F. 케네디의 초상 사진은 옆모습을 포착했다. 사진 속 케네디는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은 약간 위쪽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이 사진은 국가가 나아갈 바를 꿈꾸고, 그것의 실현을 간절히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담았다. 이런 포즈와 표정을 담은 모습이 케네디의 영혼이고 본질일까? 일상 속에서 케네디를 본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포즈와 표정, 엄청나게 다양한 정보와 그에 따른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미지가 된, 즉 하나의 정보로 고정된 케네디의 모습을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 생활에서 케네디는 행동과 표정이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많은 행동과 표정 중 어느 것이 케네디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의문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사진 에세이 <카메라 루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 마치 잠수하는 인형처럼 내 어항 속에서 나를 흔들며,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진은, 즉 이미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모습을 강요한다. 반면 실제, 즉 연속적인 시간 속의 나는 끊임없이 흐른다. 의식도 끊이지 않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육체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마디로 사람의 의식과 행위는 지리멸렬하다. 일관성이 부족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과연 내 자아의 본질이 존재할까?
▶존 F. 케네디, 사진: 유서프 카슈, 1960년
이미지란 특별한 정보로 압축하는 것
결국 이미지란 그것이 그림이든 사진이든 엄청나게 많은 정보로 구성된 인물을 특별한 정보로 압축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아름답게 말이다. 그렇게 아름답게 압축된 인물의 이미지를 보고 그 사람의 영혼이니 본질이니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유동하는 의식으로 인해 본질이란 있을 수 없다. 화내는 모습이 나의 본질일까? 질투에 불타는 모습이 나의 본질일까? 불쌍한 이를 보고 측은지심을 느끼는 모습이 나의 본질일까?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루므로 본질적인 나, 본질적인 자아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나는 어떤 순간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미워 보이기도 한다. 다리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어떻게 그렇게 다리가 아름답냐”고 묻는 질문에 “어떻게 해야 다리가 아름답게 보이는지를 안다”고 대답했다. 결국 나다운 이미지, 나의 본질과 영혼을 담은 이미지란 그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일 뿐, 진짜로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아름답게 이상화했듯, 사진이 발명된 뒤 사진작가들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 아니라 미화했다. 회화와 달리 사진은 대상을 미화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지만, 사진가들은 다양한 기술(테크닉)을 이용해 대상을 이상화했다. 특별한 포즈와 표정을 모델에게 지시하고, 조명을 비추고 카메라 거리와 각도를 조절하고, 나중에는 필름을 조작하면서까지 대상을 꾸몄다. 이것은 기계적 기록이라는 카메라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미화는 훨씬 용이해졌다. 발터 베냐민과 롤랑 바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사진의 본질을 ‘우연성’으로 보았다.
사진은 대상의 필연적인 모습, 또는 본질적이라고 여기는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우연한 순간, 유동하는 의식의 어느 한순간을 잡아낸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이러한 통찰은 사진작가들을 각성시켜 정말 꾸미지 않은 인물 사진의 등장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과 대부분의 미디어 종사자들은 사진을 아름다움과 대상의 본질(진짜 본질이 아닌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을 담는 매체로 되돌린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스타그램의 세계다. 결국 사진은 회화(또는 만화, 애니메이션)를 모방하는 것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