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남북관계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발단은 6월 4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였다. 김 부부장은 담화에서 5월 31일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2018년 4·27판문점선언과 9·19남북군사합의서 위반이라고 비판하며 “남조선 당국이 응분의 조처를 세우지 못한다면” 개성공단 철거,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폐쇄, 남북 군사합의서 파기 등을 “각오해둬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통일부는 즉각 남북합의 준수가 정부의 기본 입장이고 대북 전단 살포 중지를 위한 관련 입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6월 5일 노동당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폐쇄를 발표했고, 8일에는 대남선전매체를 동원해 정부의 ‘남북-북미 선순환관계론’을 ‘달나라타령’이라고 비판했으며, 9일에는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서 남북관계를 ‘대적관계’로 전환한다고 선언하며 남북 간의 모든 통신 연락선을 끊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청와대 차원의 공식 대응을 자제하고 국가안보회의도 소집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6월 7일 “남북평화를 반대할 사람은 없으나 분명한 건 평화는 굴종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며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관된 저자세로는 평화도, 비핵화도 앞당길 수 없다”고 말했다.
대북 전단 살포가 드러낸 ‘불편한 진실’
대북 전단 살포가 촉발한 지금의 사태는 남북관계가 ‘불편한 진실’의 영역임을 새삼 확인해준다. 북한의 언사는 분명 거칠고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더 본질적으로 ‘분명한 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북 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건’ 기존의 모든 남북합의의 첫 번째 조항은 민족자주이고 대북 전단 살포는 판문점선언 위반이라는 사실이다.
6·15공동선언은 1조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판문점선언 역시 1조 1항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고, 2조 1항에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들을 중지하고 그 수단을 철폐하며,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로 하였다.”
김 부부장 담화의 지적처럼 이러한 합의를 “모른다” 할 수는 없다. 그리고 6·15공동선언 20년을 돌아보면, 9·11테러 이후 조지 부시 정부부터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조야가 북한을 실패국가와 불량국가로만 보는 한 북미 관계의 개선은 불가능하고, 한국이 미국과의 공조와 북미 관계 개선을 앞세우는 한 남북 관계의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남북관계의 민족자주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그리고 한미동맹과 더 넓게는 보편적 국제질서가 공존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길은 없는가? 불편한 진실은 우리에게 도덕적, 전략적 고뇌를 안겨준다.
한반도 평화는 실용주의에 의해서만 가능
평화에 대한 기대로 북한의 인권 문제와 핵개발을 포함하는 군사적 ‘도발’을 용인해서도 안 되지만, 냉전의 이념적 열정으로 한반도에서 북한과 한미동맹 사이에 실제로 작동하는 ‘안보 딜레마’는 간과한 채 북한의 모든 협상 제안을 ‘위장 평화공세’로 보고 체제전환만이 한반도 평화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모험주의 역시 배격되어야 한다.
보편적 규범에 대한 존중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함께 2017년 유엔(UN) 총회에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의 탄생에도 주목해야 하며, 핵보유국가의 핵무기 철폐 의무는 제대로 강제하지 않는 비핵화체제(NPT)의 위선이나 최근 중거리핵전략조약(INF)의 탈퇴 등을 통해서 기존의 핵군비통제 체제를 파괴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보편은 특수를 부정하지 않는다. 북한은 단순히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일원으로 외교부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보편적인 ‘인간안보’ 지원 대상이 아니다. 남북관계는 통일부의 독점물도 아니고 관성적인 외교부나 국방부의 한미 공조의 대상도 아니며, 무책임한 이념적 열정의 경연장, 보수의 체제전환이나 진보의 평화체제 사회공학의 실험 대상 혹은 ‘희망 고문’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보편적 이념을 존중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이념과 이상의 추구에서는 집요하지만 실천에서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철저한 혹은 ‘처절한’ 실용주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1990년대 이래 북핵 문제의 역사는 한미 양국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 자체를 방지하지는 못한 역설적인 힘의 한계를 증명한다. 한국의 입장에서 ‘코리아 리스크’를 예방하는 것은 그 어떤 외교적 목적보다도 우선하는 절대적 명령이고, 상호주의는 남북 모두에게 합의의 이행을 요구한다.
이혜정_중앙대 정치국제학 교수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