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
서울을 떠난 지 올해로 5년이 되었다. 서울은, 하고 말하면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 든다. 서울을 떠난 뒤로 사람들은 내게 “여기 사람 아니죠?” 하고 묻는다. 이제 나는 서울 사람이 아니지만 ‘여기 사람’도 아니다. 서울을 떠나고 새롭게 생겨난 감각이 있다면 내가 어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뿐이고 나는 어디에서든 서울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태어나 보니 서울이었고 살다 보니 계속 서울에 있었다. 태어나 보니 내가 사람이고 태어나 보니 내가 여자인 것처럼. 그러니까 선택한 적 없이 나는 서울에 있었던 것이다. 은근히 서울이 아닌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러자면 선택을 해야 하고 계획도 세워야 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해야 하다니.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서울에 살았다. 그러다 나처럼 서울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고 싶어 하던 사람과 함께 덜컥 서울을 떠났다. 마치 “내일 극장에 갈까?”라고 묻듯 우리는 “제주에 가서 살까?” 하고는 한 달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해버렸다.
제주에서는 귤밭 사이에 덩그러니 집이 있어 거실 통창에서 한라산까지 가로막힌 것이 없었다. 검은 돌담들이 물결처럼 굽이도는 밭에는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이 자라고, 어느 아침엔 무를 뽑는 사람들이, 어느 아침엔 가만히 서서 잠든 말들이, 어느 아침엔 구름 걷힌 한라산이 나의 창문이 되어주었다. 하루 종일 사람 한 명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서울을 떠나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은 아침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으로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하루를 시작했다. 밤에 지구가 멸망했는데 어쩌다 실수로 우리만 남은 듯한 기분이라는 게 정말 있었다. 신이든 외계 생명체든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찾아서 없애버렸는데 귤밭 사이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몰랐던 거지. 사람이 이런 생각을 진짜로 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나는 서울 사람도 제주 사람도 아닌 채로 2년을 살았다. 몇 해를 살면 제주 사람이 될까? 할머니가 되면 제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돼도 제주 사람이 아니면 무척 서운할 텐데. 제주 사람이 되고 싶을 만큼 나는 그 집을 좋아했다.
광안대교
사진을 찍는 손님들의 셔터 소리가 시끄러워 도무지 서점에 있을 수 없는 날에는 제주에서 보냈던 그 고요한 날들이 생각난다. 간혹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손님 때문에 하루가 다 저물도록 기분이 나쁜 날에는 서울에서 살았던 날들이 생각난다. 서울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기분이 나빴는데. 그러고 보니 서울을 떠난 뒤로는 기분 나쁜 일이 간혹 생긴다. 나는 기분 나쁜 일들과 멀어지려고 서울을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기분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으면 사는 것도 좋아진다. 정말 그렇다. 서울에 가서 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지만 그때마다 바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나는 부산에서 사는 게 좋다. 앞으로도 오래 여기서 살고 싶다. 책과 바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여기서 그 둘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책을 등지면 바다가 보이고 바다를 등지면 책이 보인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지 오래되었다. 나는 자주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걸어서 못 가는구나. 나는 여기 사람이구나.
유진목_ 시인. 2016년 시집 <연애의 책>을 낸 이후 시집 <식물원>, 산문집 <교실의 시> <책이 모인 모서리 여섯 책방 이야기> 등을 썼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