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늪지인 우포늪의 일출은 태양과 늪의 수면, 그리고 다양한 수초와 동물, 벌레들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이다.
“보소, 경찰 양반. 배가 고프니 우선 라면 한 그릇 끓여주소.”
순간 탁자 맞은편에 앉아 조서를 작성하려던 수사관은 말문이 막혔다. 남자는 계속 요구했다. “곧 물고문에 통닭구이 고문을 당할 텐데 식사나 하고 받읍시다.”
대공분실의 악명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던 시절이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온 사나이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수사관을 조롱했다. 대공분실의 밀폐된 수사실에 잡혀오면 대부분 숨도 제대로 못 쉴 때인데 라면을 끓여 오라니….
마른 체구에 두 눈이 살아 있는 남자의 놀라운 ‘배짱’에 경찰 수사관은 손을 들었다.
남자는 1989년 당시 해직 교사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남지부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북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 카페에 불온서적을 비치한 혐의로 끌려온 남자는 이인식(67) 씨. 이 씨는 후일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경남 창녕의 우포늪으로 스며들었다. 우포늪 지킴이가 된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습지인 우포늪이 원시 모습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배경에는 대공분실에서 라면을 요구했던 이 씨의 배짱과 지역개발을 하려는 주민들을 막다가 구타당해 입원까지 하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고집이 자리 잡고 있다.
▶이인식 씨가 새벽에 우포늪의 자연을 관찰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람사르 습지도시 인정
5월 27일 새벽 5시, 이 씨의 낡은 트럭을 타고 우포늪으로 나섰다. 동트기 전 어둡고 좁다란 논두렁길인데 이 씨는 마치 8차선 도로에서 운전하듯 여유롭다. 매일 일과이다.
여명의 습지는 엄숙하다. 고요하다. 귀를 기울인다. 황소개구리의 낮게 깔리는 소리는 수생식물의 아침을 깨운다. 그 소리는 울음이 아니다. 생명의 소리다. 물 위에 떠 있는 무수한 개구리밥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요동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풀벌레들의 가냘픈 소리도 힘이 있다. 이곳은 그들의 세상이니까. 왜가리가 난다. 수천㎞를 날아온 왜가리의 날개는 피곤하지만 우아하다. 마치 늪지의 제왕인 듯 저공비행을 하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마침내 해가 뜬다. 늪지의 일출은 오케스트라다. 물안개는 태양의 등장을 예고하며 살며시 모습을 감춘다. 푸르던 물빛은 보랏빛으로 바뀌더니 이내 주황색으로 변신한다. 수면에 투영되는 구름의 빛깔도 시시각각 바뀐다. 습지가 깨어난다. 원시의 신비로움이 점차 현실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늪지의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가 배를 저어 늪지 한가운데로 간다. 큰 붕어와 잉어가 새벽의 기운을 받아 솟구친다.
▶우포늪은 세계 최초의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정받을 만큼 생태적 가치가 크다. 우포늪의 일출은 몽환적이다.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우포늪은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 산밖벌 등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늪으로 이어진다. 담수 면적은 2.50㎢로, 여의도 면적과 비슷하다. 1억 4000만 년 전에 생성된 늪에는 가시연꽃, 자라풀 등 식물 800여 종과 천연기념물 큰고니와 노랑부리저어새 등 200여 종의 조류, 멸종위기종 수달과 담비, 삵 등 2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우포늪은 1998년 국제 공인 람사르 습지에 등재됐고, 2011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2018년에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정받았다.
▶우포늪에서 왜가리가 붕어를 잡아 삼키려고 애쓰고 있다.
수달, 왜가리, 따오기… 생태계의 보고
늪지로 들어선다. “이것 보세요. 방금 수달이 지나간 흔적입니다.” 이 씨가 설명한다. 징검다리 돌 위에 검은 배설물이 있다. “두 마리의 배설물입니다. 아직 물기가 그대로 있어요.”
사초군락지에 들어 산다. 사초군락지는 새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장소다. 어른 키만 한 빽빽한 풀들이 인간의 접근을 막는다. 수로 옆에는 왕버들나무가 이어진다. 물 옆에서 자라는 왕버들나무는 인간이 거울을 보며 얼굴을 치장하듯 왕버들은 흐르는 맑은 수로 위에 자신의 자태를 투영한다.
갑자기 이 씨가 소리를 낮추며 “이리 오세요”라고 부른다. 논두렁에서 불과 3m도 떨어지지 않은 얕은 물에 왜가리가 서 있다. 왜가리는 방금 커다란 붕어를 입에 물었다. 거의 월척에 가까운 큰 붕어다. 왜가리는 붕어를 삼키지 못한다. 왜가리의 입에 머리를 몰린 붕어는 꼬리를 흔들며 몸부림친다. 왜가리는 붕어를 안 놓치려고 버틴다. 그야말로 야생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의 처절한 현장이다. 왜가리는 고개를 들어 붕어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붕어는 버틴다. 지친 왜가리는 고개를 숙이고 힘을 비축한 뒤 다시 붕어를 공략한다. 무려 20분간 붕어를 입에 물고 있던 왜가리는 마침내 그 큰 붕어를 입 안에 삼킨다. 왜가리의 가는 목이 붕어가 들어가며 굵게 변한다. 왜가리는 힘차게 날개를 친다. 마치 보잉 여객기가 여객과 화물을 가득 싣고 활주로를 비상하듯, 왜가리는 수면을 치고 높이 날아오른다.
늪지 한쪽 높은 곳에 왜가리 집단번식지가 있다. 붕어를 삼킨 왜가리는 그 집단번식지로 방향을 튼다. 수십 마리의 왜가리가 아침을 노래한다. 먹이를 물고 날아드는 어미를 큰 소리로 반긴다.
▶우포늪의 백로가 날갯짓하며 날고 있다.
우포늪을 최고의 야생공원으로
우포늪은 천연기념물 제198호인 따오기로 유명하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교과서에 실린 동요 ‘따오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 새는 1980년대 전까지 한반도에 흔한 새였다. 따오기는 1979년 비무장지대(DMZ)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2008년 이명박정부 시절 한중 정상회담 때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따오기 한 쌍을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기증하면서 우포늪에서 복원이 시작됐다. 창녕군이 우포늪 인근에 따오기복원센터를 설치하고 복원 노력을 한 결과 지금은 400여 마리로 개체 수가 늘었다.
당시 중국에서 따오기를 들여오는 데 앞장섰던 이 씨는 하루빨리 따오기가 한반도 텃새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 마침 5월 28일에는 2019년에 이어 따오기 2차 방사가 진행됐다. 2019년에도 40마리를 방사했는데 25마리만 야생 적응에 성공했다.
▶국내에서 멸종됐던 따오기는 우포늪에서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이인식
해직 교사였던 이 씨가 우포 지킴이로 변신한 계기는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당시 마산창원 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던 이 씨는 습지가 강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완충지대임을 깨닫고, 교사 정년을 5년 앞두고 그만둔 뒤 우포늪으로 10년 전 주거지를 옮겼다. 매일 아침 이 씨는 카메라와 망원경을 들고 우포늪으로 간다. 그리고 우포늪의 사계절 변화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이제는 데이터가 늪지를 살립니다. 기록하고 남겨야 이 보배로운 우포늪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현재 우포자연학교 교장인 이 씨는 주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우포의 자연을 설명하고 보여준다. 놀랍게도 그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어떤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우포를 지킨다. 최소한의 생활비지만 그가 떳떳하게 우포늪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는 우포늪을 최고의 야생공원으로 발전시킬 꿈을 키우고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새로운 꿈을 꾼다. 그는 행복하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