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계화, 거대 정부, 악수의 종말, 탈오피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인류 사회 흐름을 완전히 바꿀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데버라 엘름 아시아무역센터 이사는 “코로나19는 경제·정치·사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예견했다. 브리지드 라판 유럽대연구소(EUI) 교수는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 바뀔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뉴노멀(새로운 표준)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민하게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도 코로나19 방역에서 보인 성과를 경제 분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언급한 ‘한국판 뉴딜’이 그 첫 번째 과제다.
‘디지털 뉴딜’로 패러다임 전환
석학들은 코로나19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는 자유방임주의를 쇠퇴시키고 거대 정부가 확산될 것으로 예상한다. 코로나19로 각국 정부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속도로 돈을 풀기 시작했다. 유럽외교협회 베셀라 체르네바 부회장은 “거대한 위기는 거대한 권력을 만들어낸다. 강한 신념으로 무장한 막강한 지도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고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가계, 기업 등 경제주체 간 연대는 강화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는 “최악의 수는 서로 분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화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글로벌 기업들은 재고를 적정량만 쌓아놓고,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산해 생산 효율을 높이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 방식의 공급망을 세계에 구축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생산 거점을 자국 안으로 옮기는 등 공급망 재구축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에릭 존스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가치사슬(밸류체인)이 자국·지역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화한 생산방식의 취약성을 모두가 인식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온라인 경제활동에 소극적인 국가와 중장년층도 코로나19를 계기로 ‘비대면’을 경험하면서 비대면 경제 또한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22일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할 기획단을 신속히 준비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대규모 재정투자와 제도개선 병행
한국 정부도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달라진 경제 운영방식이나 작동 원리에 대비하고자 정부는 한국판 뉴딜의 구체적인 방향과 구상, 모델 등을 5월 7일 발표했다. 한국판 뉴딜에는 비대면 산업 육성을 포함한 디지털 국가로 전환 방안 등 코로나19 종식 이후인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선도하기 위한 대책이 대거 담겼다.
대규모 재정투자와 제도개선 병행을 통한 ‘한국판 뉴딜’을 추진해 융복합 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반복될 우려가 있는 재벌 쏠림 현상을 막고자 ‘포용적 회복’을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한국판 뉴딜이 5세대 이동통신(5G)·인공지능(AI) 등을 이미 선점한 재벌을 더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추진 과정에서 중요한 원칙은 포용적 회복으로, 사각지대나 양극화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차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중앙대책본부(경제 중대본) 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며 “3대 분야 혁신 프로젝트를 통해 융복합 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의 선순환 구조를 빠르게 구축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판 뉴딜’로 정한 3대 분야 혁신 프로젝트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집중 육성 ▲사회간접자본(SOC)의 디지털화다. 김 차관은 “한국판 뉴딜 프로젝트는 디지털 기반 프로젝트에 집중해 민간투자와 시너지가 크고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과제로 전 산업·전 분야의 기초가 되는 혁신 인프라로서, 임팩트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4대 원칙 아래 선정했다”고 밝혔다.
3대 분야 구체화한 10대 중점 과제
3대 분야를 구체화한 10대 중점 과제는 ▲ 데이터 전(全) 주기 인프라 강화 ▲데이터 수집·활용 확대 ▲5G 인프라 조기 구축 ▲5G+ 융복합 사업 촉진 ▲인공지능(AI) 데이터·인프라 확충 ▲전 산업으로 AI 융합 확산 ▲비대면 서비스 확산 기반 조성 ▲클라우드 및 사이버 안전망 강화 ▲노후 SOC 디지털화 ▲디지털 물류서비스 체계 구축이다.
김 차관은 비대면 서비스 확산이 원격의료 제도화를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선을 그었다. 그는 “이미 하던 의료 취약지에 대한 원격 모니터링(건강상태 파악과 해석)과 상담 중심으로 시범사업 대상을 한시적으로 조금 확대하고 인프라를 보강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소·중견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도 강화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5월 7일 제20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 운영위원회를 열고 ‘2021년도 정부 연구개발 투자 방향 및 기준 수정(안)’을 심의·의결했다. 과기정통부는 기존에 수립된 투자 방향에 코로나19 이후인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 방향을 보완했다.
정부는 경제 위기에 취약한 중소·중견기업 연구개발과 연구 인력의 고용을 유지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투자를 강화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기술 자립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과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내용도 담겼다.?
또 정부는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산업과 의약·바이오산업 등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끌 유망 분야에 집중 투자해 포스트 코로나 체제에 대비하기로 했다. 아울러 일몰사업에도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추가로 예산을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 일몰관리 혁신’ 제도를 추진할 계획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기획재정부
재택근무 확산은 ‘사무실 몰락’으로
코로나19로 인해 노동계에도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재택근무 확산은 ‘사무실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데버라 엘름 아시아무역센터 이사는 “원격근무의 확산은 사무실 건물의 공동화(空洞化)를 불러와 부동산 시장에도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세계 주요국 직장인들이 코로나19 때문에 집에서 일하기 실험에 의도치 않게 참여했다. 모여서 일한다는 관행은 코로나로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교수는 “어떤 일을 할지 제대로 정하기만 하면 집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됐다. 통근 전철을 매일 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동환경 변화에 맞춰 정부도 비대면 산업 등의 일자리 창출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5월 1일 코로나19 사태가 초래할 경제·산업 환경 변화에 맞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일자리 창출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열린 정부 고용위기 대응반 첫 회의에서 코로나19 이후에 대비한 ‘포스트 코로나 일자리’를 준비하겠다며 “의료, 교육, 유통 등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산업과 5G 통신망 등 대규모 투자가 예상되는 분야의 신속한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당장 회복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정보기술(IT)을 활용한 비대면 분야에서 청년 등 취약계층에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고 지속가능한 일자리로 발전시켜가겠다”고 강조했다.
▶정병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이 4월 28일 충북 청주시 바이오톡스텍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선제대응을 위한 연구산업육성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강종구 바이오톡스텍 대표 등 연구산업기업 대표들과 연구산업 활성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비대면·디지털 분야 55만 개 일자리 창출
정부가 4월 22일 발표한 10조 1000억 원 규모의 고용안정 특별대책에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정부 부문 비대면·디지털 분야 일자리 등 55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계획이 포함된 바 있다.
이 장관은 “현재의 경제 위기는 코로나19라는 외부적 충격이 주요 원인”이라며 “이런 외생적 변수가 국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게 이번 위기 극복의 기본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또 “고용유지 기업에 대한 인건비 융자 사업, 노사 간 고용유지 협약을 맺은 기업 지원 사업 등을 조만간 시행할 예정”이라며 “정부의 기업 지원 사업에서 고용유지 기업을 우대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고용위기 대응반은 정부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고용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한 ‘비상경제중앙대책본부’ 산하 기구로 이 장관을 반장으로 하고 관련 14개 부처 차관급이 참여한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