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대왕은 늘 ‘너는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갑자기 상부(上部) 고씨에게 시집가라고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요? 한낱 필부도 거짓말(食言)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허튼소리(戱言)를 하시다니요. 저는 대왕의 잘못된 명을 받들 수 없사옵니다.”
고구려 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의 사랑하는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어 유력한 귀족인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이렇게 대들었다. 공주는 자기가 어려서 울 때마다 왕이 “네가 이렇게 울면 귀족의 처가 되지 못하고 온달에게 시집보낼 것”이라고 한 말을 끄집어냈다. 왕은 화가 나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 딸이 아니다. 함께 살 수 없으니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내쫓았다. 공주는 보석 10여 개를 팔뚝에 감고 궁을 나와 온달의 집으로 가서 그와 결혼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먹을 것을 얻어다 어머니를 공양하던 우스울 정도로 못생긴 온달은 갑자기 찾아온 공주 덕분에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 온달은 신라와 싸우러 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온달처럼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하는 것을 ‘온달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고생고생하다 멋진 왕자를 만나 왕비가 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빗댄 말이다.
과장된 ‘온달 콤플렉스’
‘온달열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온달 콤플렉스가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온달을 그렇게 묘사한 것은 극적 효과를 노린 ‘문학적 표현’이며 실제로는 강력해지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평강왕이 온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주가 울 때마다 온달을 거론했다는 것은 온달이 고씨 같은 유명한 귀족은 아닐지라도 무술과 효성 등으로 평양성에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이다.
둘째, 공주가 왕명을 거스르고 고씨 대신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 피운 사실이다. 아무리 공주지만 왕명에 대해 어릴 때 일을 얘기하며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요즘에는 가능하겠지만…). 공주가 고씨 대신 온달을 택한 것은, 부마를 강력히 요구하는 당시 실권자였던 고씨 귀족에 대해 왕과 공주가 연합전선을 편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공주가 궁을 나서면서 보물을 잔뜩 챙겨 갔다는 사실이다. 왕이 정말 화났다면 공주를 내쫓을 때 보물을 갖고 가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주는 온달과 결혼한 뒤 보물을 팔아 집, 농토는 물론 노비를 사고 온달을 장군으로 키우는 데 필요한 소와 말, 기물을 사들였다. 왕의 도움이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공주가 버젓이 한 것이다.
넷째, 온달이 대형(大兄)이라는 중요한 지위까지 올랐다는 사실이다. 후주(後周) 무제가 쳐들어왔을 때(578년)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배산(拜山)의 들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공으로 온달은 정식으로 평강왕의 사위로 받아들여지고 대형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고구려에서 온달이 정말 최하층이었다면 왕의 사위는 물론 대형이란 고위직에 올라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섯째, 온달의 최후와 관련된 사실이다.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한강 유역을 침탈한 신라를 정벌하겠다고 상주해 허락을 받았다. 출정하면서 온달은 “계립(鷄立)현과 죽령 이서 지역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단(阿丹)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시신이 든 관이 움직이지 않아 공주가 가서 “죽음과 삶이 이미 결정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자 관이 움직였다. 온달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신라와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아군에 의해 피살됐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는 영양왕 즉위 초 한강 유역 회복이라는 평강왕의 숙원을 풀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아이디어·재료’ 신(新)생산의 3요소
2018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로머는 생산의 3요소로 사람(People), 아이디어(Ideas), 재료(Things)를 제시했다. 이는 토지·노동·자본이라는 전통적인 생산의 3요소와는 아주 다른 접근이다. 토지·노동·자본은 공장에서 물건을 대량생산하는 산업혁명 시기에나 적용되는 것이며,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는 21세기에는 사람(인간 특유의 노하우, 기술, 강점을 지닌 모든 인간)과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며, 사람과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것을 실현하는 재료(토지나 육체노동, 자본 등)는 조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에게 시집갔다는 것은 평강왕과 공주가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 선비족과 백제·신라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인재를 발굴한 것이다. 1400년 전에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바보온달을 발탁한 평강왕과 공주는 선대 양원왕 때 약화됐던 왕권을 강화하고 내정과 국방을 갖춰 수와 당의 대대적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코로나19로 경제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지금, ‘온달 콤플렉스’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실행 능력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홍찬선_ <한국경제> <동아일보> <머니투데이>에서 28년간 기자를 지냈다. 저서로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임시정부 100년 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 역서에 <비즈니스 경제학> <철학이 있는 부자>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