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신종 감염병인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국내에서 발생했을 때, 언론은 경쟁하듯 메르스의 위험성을 부각하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구 쏟아냈다. 덩달아 국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의료 전문가들은 언론의 냉철한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이미 경험한 실수들을 메르스 때 또다시 반복하면서, 각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감염병과 관련해서는 과장·추측 기사가 난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따라 2019년 한국과학기자협회와 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 의료 전문가들이 모여 가칭 ‘감염병 보도준칙’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6개월여 논의 끝에 감염병 최초 발생부터 종식까지 신속하면서 정확한 보도를 위해 기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을 만들었지만, 발표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기자들 스스로가 아닌 외부 전문가가 중심이 되어 만든 원칙을 기자들이 얼마나 실효성 있게 받아들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과학기자협회는 국내 최대 기자단체인 한국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2020년 2월 말 외부인을 포함하지 않고 각 협회 대표 2명씩 기자들로만 구성된 ‘감염병 보도준칙 제정위원회’를 출범하게 되었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2019년 한국과학기자협회에서 만든 안을 재점검하는 자리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모인 자리였다.
감염병 보도준칙 제정위원회가 결성된 2월은 우리나라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많이 발생해 ‘방역 후진국’이라는 오명 속에 세계인이 기피하는 위험국가로 분류되던 시점이었다. 이에 세계 각국이 한국인에 대해 속속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이드라인’과 ‘보도준칙’ 사이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확하면서 냉정한 언론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은 더욱 커져갔고, 아직 관련 사례가 없는 감염병 보도준칙을 우리 기자들이 먼저 만들어 실천해나가면 세계 언론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회의 참석자들에게 많은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논의는 첫 회의부터 삐걱거렸다. 명칭을 ‘보도준칙’으로 할지, ‘가이드라인’으로 할지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기자들에게 무언가 자꾸 기준을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언론통제로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확인된 것만 써야 한다면 의료진이나 정부 기관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실체적 사실이나 위험성에 대해 누가 국민에게 경고할 것이냐는 반론도 만만찮았다.
또 한국과학기자협회에서 만든 초안이 있다고 해도 각자 일이 있기 때문에 매주 한 번씩 회의를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만들어져 각 언론사에서 활용하는 자살 보도준칙이나 인권 보도준칙 등이 형식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됐지만, 감염병 보도준칙은 내용 면에서 기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부분도 많아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후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준칙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절망하기도 했다.
다만 국가를 운영하는 법도 시대가 바뀌면 개정하듯 굴러갈 수 있는 ‘첫 눈덩이’를 만들자는 심정으로, 마침내 6명의 위원이 진통 끝에 각 추천 단체의 비준을 거쳐 결과물을 내놓았다. 전문에서 밝힌 것처럼 감염병 관련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국민의 생명 보호와 안전에 직결된다는 점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실천 사항을 정리해나갔다.
명칭도 3개 기자단체의 비준을 거치면서 기자들 스스로 만든 원칙인 만큼 ‘가이드라인’보다 ‘보도준칙’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여기에는 기자 개개인의 일이라기보다는 감염병 발생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고, 신속 정확하게 알려야 하는 정부와 각 언론사의 적극적인 역할까지 함께 주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 한국과학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제정해 4월 28일 공식 발표한 ‘감염병 보도준칙’은 그동안의 기준과는 차별화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하고 싶다.
권태훈 감염병 보도준칙 제정위원장(《SB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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