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1793,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을 필두로 7월 혁명(1830년 7월)과 2월 혁명(1848년 2월)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프랑스는 혁명에서 잉태돼 혁명으로 완성된 국가다.
혁명과 쿠데타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을 탈취 또는 교체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러나 혁명은 민중봉기나 국민의 참여, 동의 아래 피지배 계층이 정권교체의 주체로 부상하는 반면 쿠데타는 국민의 의사나 주도적인 참여 없이 지배 세력의 일부가 정권교체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출범한 프랑스 제1공화국(1792~1804)의 국민공회 의원으로 활동한 혁명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는 점은 놀랍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부터 1795년 10월까지 프랑스 정치의 산실인 의회로, 다비드는 1792년부터 1793년까지 국민공회 의원 겸 예술위원회 위원으로 혁명 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서사적이며 정치색 짙은 역사화
혁명정부의 급진정당 자코뱅당을 이끈 로베스피에르(1758~1794)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다비드는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다비드는 당대의 유명 화가 프랑수아 부셰(1703~1770) 등을 사사한 뒤 1766년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미술학도로서 최고의 영예인 로마상을 받으며 전도유망한 앞날을 보장받았다. 1775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5년 동안 머물며 카라바조 등 거장들의 작품에 심취하며 그들의 기법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계승·발전시켜 나갔다. 그것이 바로 명암대비 등 강렬하면서 극적인 표현 효과와 사실주의 기법을 하나로 통일한 신고전주의 미술 사조다. 고대 로마신화에 바탕을 둔 서사적이면서 정치색 짙은 역사화에 능했으며 다비드의 후계자로 꼽히는 앵그르, 낭만주의 미술을 탄생시킨 제리코와 들라크루아 등 후배 화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1789년 7월 14일 성난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도화선이 된 프랑스 대혁명 5년째인 1793년, 다비드는 자신의 대표작인 한 점의 그림을 제작한다. 암살당한 자코뱅당의 실력자 장 폴 마라(1743~1793)를 혁명적인 순교자로 내세운 ‘마라의 죽음’이다. 의사 출신인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급진 언론인이자 혁명적인 정치가로 자코뱅당의 핵심 인물이었는데, 자택 욕실에서 반대파인 지롱드당의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가 몰래 숨겨 들여온 칼에 찔려 사망했다. 다비드는 피살된 마라를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로 묘사했고, 마라의 지지자들은 이 그림에 열광했다.
마라가 살해된 이듬해, 마라와 함께 자코뱅당을 이끌던 로베스피에르가 실각에 이어 처형당하자 다비드도 체포돼 투옥의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성만큼이나 비범한 정무 감각이 몸에 밴 다비드는 17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 1세(1769~1821)의 지지파가 되면서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이 열린 1804년 그해에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가 된 다비드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6~1807),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1812) 등 그를 영웅시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14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당하자 벨기에로 망명한 다비드는 브뤼셀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간 끝에 1825년 12월 77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1×64cm, 1794, 루브르박물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비드 덕에 혁명의 상징이 된 마라
마라의 죽음을 정치적인 의도로 미화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정치 선동화다. 다비드의 탁월한 예술적 기획력 덕분에 단숨에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마라는 이 그림에서 숭고한 순교자 이미지로 그려졌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욕실 벽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실제와는 다르다. 욕조 앞의 허름한 나무 상자와 함께 일체의 세속적 욕망을 멀리하는 청렴함과 희생을 상징하는 장치다.
마라가 왼손에 쥐고 있는 메모는 코르데가 보낸 거짓 탄원서.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저에게, 당신의 자비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마라의 왼손 엄지가 가리키는 단어는 ‘자비.’ 민중을 구원하려다 희생당한 마라의 숭고한 혁명 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다비드의 계산이나 다름없다. 나무 상자 위에 떨어질 듯 놓인 지폐와 또 다른 쪽지 메모. ‘조국을 지키다 죽은 남편이 다섯 아이의 어머니에게 전하는 돈’이라고 적혀 있는데, 마라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각인시키려는 다비드의 배려다. 평온한 얼굴로 우리 쪽으로 기운 고개, 오른손 옆에 보이는 피 묻은 칼, 가슴에 난 상처도 혁명을 위해 온몸을 바친 마라의 순교자적 흔적을 의미한다.
다비드는 마지막으로 친구이자 혁명 동지인 마라에게 바치는 두 단어로 된 짧은 추도의 글을 나무 상자 아래쪽에 적었다. ‘마라에게, 다비드가.’
‘마라의 죽음’은 다비드의 망명지였던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1893년부터 소장 중이다. 캔버스에 유화 작품으로 세로 165cm, 가로 128cm 크기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