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지금 나에게 몇 개의 얼굴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있다. 며칠 전 누군가 “잘 숨기고 살아, 너 진짜 악한 거”라고 충고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숨기라는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애가 만나본 나의 친구와 동료 작가들을 말하는 것일 테고. 어쩌면 간혹 서점으로 찾아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독자들까지 포함할 수 있다. 혹시 내가 남편에게도 나의 악함을 숨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나란 사람은 과연 굉장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 애는 1년하고 넉 달을 알고 지내면서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다며 “음” 하고 망설이는 의성어를 쓴 뒤 덧붙였다. 그동안 자신이 나에게 친구인 척 속여왔다는 것이다. 나를 한 번도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건 매우 상처가 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상처를 받아야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고. 자신이 사기꾼의 그것과 흡사한 태도로 나와 1년하고 넉 달 동안 관계를 맺어왔음을 굳이 고백하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 신기했다.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되는 걸 보면 조금은 아닌 것 같고 많이 신기했다고 하자.
그 애의 경고는 1년하고 넉 달을 알고 보니 내가 매우 악한 사람이라서 타인들에게 그것을 들켰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질타를 받을 것이라는 뜻인 듯하다. 그 애가 알게 된 것처럼 나의 본모습이 악하다는 것을 알면, 그 애가 그런 것처럼 모두가 나를 떠날 것이라는 충고다. 그러니까 그 애는 내가 나의 친구와 동료 작가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몹시 분노에 차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어떤지는 모른다. 많은 경우 내 속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남의 속을 어찌 알겠나.) 내가 그 애 때문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암막 커튼을 치고서 침대에 누워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치를 떨고 있을 때 그 애는 매우 태연했다. 그렇게 태연하던 애가 내게 충고를 하고 매우 치명적인 듯한 비밀을 알려준 것은 내가 지금까지 상심한 것으로는 자신에게 부족해서일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짐작일 뿐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 애가 몇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악하다.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그럴 수가 있나. 내게 주어진 것들이 전부 나의 ‘가짜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애가 내게서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그 애가 끝까지 나를 속이지 못해서 끝나버린 관계를 나는 수년에 걸쳐 다른 사람들을 ‘속여가며’ 관계를 맺고 있으니 말이다. 노파심에 말해두자면, 타인을 속이는 것으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을 달리 설득할 방도는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니라 서로의 좋고 싫음을 매 순간 조심하며 주고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다 무슨 소용?
어쨌거나 나는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얼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나와 관계를 맺는 타인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과 마주하는 건강한 태도를 익히고 사용하지 못하면 사람은 금방 혼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며 개인적으로 긴밀하고 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사기다. 이런 일들은 각종 방송사의 탐사보도 프로그램에도 숱하게 나온다.
한편 서로 맡은 바를 위해 각자의 싫음을 참고 원만하게 일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원만하게 일을 이끌고 좋은 결과를 내는 데 꼭 긴밀하고 내밀한 관계일 필요는 없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이는 것만큼 짜릿한 경험도 없다. 그 사이에 서로의 감정이 끼어들면 그때부터 현생의 지옥이 시작된다. “아까 내가 너무 바빠서 말을 평소와 달리 급하게 한 것 같아. 혹시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앞선 미사여구 따위를 자신이 일하는 동력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어느 사이 표정이 어둡고 무언가 말을 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그러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좋아하는 영화도 한 편 보고 푹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책을 읽다 잠드는 대신 어두운 얼굴을 한 사람과 저녁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오해를 푸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쓰면서 살짝 몸서리를 쳤다. 정말 싫은가 보다.)
이것만큼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내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어느 작가의 너무나도 못 쓴 글? 가짜 뉴스? 입만 열면 서로의 지인을 험담하는 사람들? 바지 지퍼를 올리며 공중화장실을 나오는 사람?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 나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소중한 기분을 위해서.
유진목_ 시인. 2016년 시집 <연애의 책>을 낸 이후 시집 <식물원>, 산문집 <교실의 시> <책이 모인 모서리 여섯 책방 이야기> 등을 썼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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