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선이 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의 군산오름 정상을 관광객들이 오르고 있다.
바람이다. 거침없는 바람이다. 바람은 기운이다. 바람이 강할수록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불어온다. 수많은 바다의 사연을 품은 바람은 제주 오름의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한껏 머금고 비탈을 타고 올라온다. 바람 소리가 거칠다. 바닷바람은 오랜 용암의 빈틈을 뚫고, 억센 풀잎의 저항을 헤치며 밀려온다.
“여기가 제주 368개 오름 가운데 가장 강한 기(氣)가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바람을 마주 하며 두 손을 앞으로 둥글게 내밀고 무릎을 구부린 채 눈을 감는다. 오름의 기운을 느끼는 자세다. 따라 한다. 코로 조심스럽게 들이쉰 바닷바람은 기도를 타고 허파 속으로 파고든다. 바닷바람의 기운을 아랫배로 내려보낸다. 거친 바람 소리가 온몸에 전달된다. 발바닥에서 기운이 차오른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땅기운과 위에서 내려간 바다 기운은 배꼽 근처에서 합쳐지며 휘몰아 돈다. 한동안 눈을 감았다.
신선이 보름달을 보는 듯한 ‘군산오름’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다. 새파란 바다가 눈이 부시게 출렁인다. 제주 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한라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왜 여기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인가요?”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최고의 명당입니다. 동서 양쪽에 봉우리가 자리 잡고 그 사이를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줍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신선이 밝은 달을 바라보는 형국입니다. ‘쌍선망월형(雙仙望月形)’입니다.” 두 신선이 사이좋게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
이 오름의 이름은 군산오름이다. 제주 남서쪽 서귀포시와 안덕면의 경계에 자리한다. 오름의 형상이 진을 친 군막형이라 군산(軍山)이라고 부른다. 제주 오름 전문가 신영대 교수(제주 관광대)가 설명한다.
제주 오름 가운데 비경(秘景) 세 곳을 안내해달라는 부탁에 신 교수가 처음으로 꼽은 오름이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밝다. 제주 오름을 풍수로 풀이한 책 <제주의 오름과 풍수>를 쓰기도 했다.
군산오름의 정상 근처는 금장지(禁葬地)다. 묘소를 쓰면 안 되는 곳이다. 이곳에 조상의 산소를 쓰면 후손에게 재앙이 온다는 곳. 명당인데 묘를 쓰면 안 된다니….
신 교수는 명쾌하게 설명한다. “마을로 내려오는 지맥의 혈(穴)에 묘를 쓰면 개인에게는 복이 오나, 마을의 안녕을 깨고 원인 모를 재앙을 마을에 안겨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금장 신앙이 생겼어요,” 전체를 위해 개인의 안녕을 뒤로한 것이다.
▶제주 서귀포의 영아리오름 정상에는 커다란 용암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어 신비함을 고조시킨다.
추사 김정희가 거닐던 안덕계곡
제주도에는 군산오름 외에도 별도봉과 산방산이 금장지로 꼽힌다. 이들 오름의 중간중간에는 묘소가 많다. 정상에는 묘를 못 쓰니 중턱에라도 묘를 썼기 때문이다.
군산오름에 오르려면 안덕계곡을 거쳐야 한다. 안덕계곡은 한겨울에도 짙은 녹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웅장한 바위가 시선을 압도하고, 활엽 상록수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다. 안덕계곡을 품은 창고천은 오래전부터 물 맑고 풍광이 가장 빼어난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조선시대에 제주 대정현으로 귀양 온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자주 거닐었던 계곡으로, 계곡 입구에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에서 만난 추사. 반갑다는 생각이 들면서, 55세의 늦은 나이에 제주도에 귀양 와서 9년을 살았던 추사의 아픔이 진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제주가 치유의 땅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최악의 귀양지였다. 조선시대 유배 가운데 가혹한 조처인 절도안치(絶島安置) 중에서도 가장 중한 처벌이 제주도 귀양이었다. 절해고도에서 서서히 죽어가라고 보낸 귀양 조처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제주로 유배된 사람은 200여 명이고, 추사가 귀양 온 대정현까지 유배된 ‘죄인’은 30여 명. 대정현은 제주에서도 가장 남쪽이니 더는 멀리 보낼 수가 없었던 셈이다. 당시 병조참판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당쟁에 밀려 고문당하고 유배까지 온 추사는 서예를 탐구하며 귀양의 고통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추사는 제주의 제자들에게 큰 그릇에 물을 담아 오라고 한 뒤, 먹을 갈아 종이가 아닌 그릇 물에 일필휘지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추사가 물 위에 쓴 글씨가 물에 풀어지지 않고 한동안 그 형태를 유지했다고 하니, 추사 서예의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추사체의 영감을 준 ‘단산오름’
신 교수는 내친김에 군산오름 가까이 추사가 머물렀던 집과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향교, 그리고 추사체의 영감을 준 단산오름에 가보자고 이끈다.
제주에 유배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앞다퉈 이들과 사귀려 했고, 자녀 교육 등을 부탁했다고 한다. 추사는 당시 대정의 갑부 강도순 집에 몇 년간 머물며 유배 생활을 했다. 지금 그곳에는 추사기념관이 있다. 강도순 초가집은 제주4·3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으나 그 후 고증에 따라 다시 지었다. 추사의 오랜 동갑내기 친구로 제주에 위로 방문까지 했던 고승 초의선사(1786~1866)와 추사가 마주해 차담 나누는 모습을 재현한 방도 있다.
추사가 후학을 가르쳤던 대정향교 마당에는 추사의 ‘세한도’에 그려진 실제 모델인 커다란 소나무가 아직도 있다. 신 교수가 대정향교를 풍수로 설명한다. “대정향교는 봉황이 둥지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을 이루고 있어요. 이런 지형은 성인군자를 많이 배출한다는 명당으로 유명하죠. 특히 향교 뒤를 받치고 있는 단산 북쪽의 맥이 강하게 대정향교 대성전으로 내려오고, 향교 앞 광활한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요.” 아마도 제주에 귀한 눈발이 날리던 날, 추사는 향교 마루에서 소나무를 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빈집 한 채의 양옆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서 대칭을 이루는 ‘세한도’에서 추사는 감정을 절제하며 텅 빈 여백으로 고독한 유배 생활에서 느낀 비애의 감정을 표현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자주 거닐었던 안덕계곡의 깊은 연못
맑은 호수 물에 비치는 ‘영아리오름’
단산오름에 오른다. 가파르고 험하다. 제주 오름 가운데 험하기로 손꼽힌다. 하지만 258개의 계단을 치고 올라 단산 정상에 이르면 사방이 광활하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한 가닥 오름 맥이 산방산으로 이어져 잠시 멈췄다가 단산과 송악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마라도로 연결된다. 추사는 단산의 뾰족한 모습에 영감을 얻어 추사체를 완성했다고 한다.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방을 둘러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까이로는 산방산이, 멀리로는 한라산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거친 바다는 멋진 배경이다.
“백호맥인 금산오름은 아름다운 여인이 거문고를 타는 형상인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지세입니다.” 아마도 추사 역시 가쁜 숨을 내쉬며 이곳에 올랐으리라.
신 교수의 세 번째 오름 비경은 영아리오름이다. 단산에서 멀지 않다. 영아리의 ‘아리’는 산이라는 뜻의 만주어고, 영은 영산(靈山), 즉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다. 오름 중간에 호수가 있다. 맑은 호수 물에 오름이 거울처럼 투영된다. 신비하다. “용이 엎드려 물을 마시는 와룡음수형(臥龍飮水形)의 형국입니다.”
영아리오름의 정상에는 커다란 용암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화산 폭발 때 날아온 것이다.
신 교수가 부채를 들고 태극권을 선보인다. 한라의 기운과 태극권의 기운이 부드럽게 만난다. 그는 40대부터 중국 각종 유파의 태극권을 사사했고, 국제 태극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태극권의 고수다. 그의 손에 있는 파란 부채의 날랜 선이 한라산 끝자락을 경쾌하게 타격한다. “쨍.”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