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수많은 생명을 속절없이 잃는 모습이 끔찍하다. 경제적 충격 또한 공포스럽다. 코로나19가 일으킨 경제적 파장은 ‘봉쇄’가 어렵다. 이미 실물과 금융, 지역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타격을 받는 가운데 세계 각국이 경제 붕괴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활동의 위축은 전방위로 나타난다. 국내에서도 2월부터 소비, 생산, 투자, 수출 등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이 뚜렷이 약화하고 있다. 2020년 상반기 국내총생산(GDP)의 역성장을 점치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그나마 활력을 유지하는 분야는 연구개발(R&D) 투자다. R&D 투자는 급격한 경기 하방을 완화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코로나19가 종식된 뒤에는 경기회복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정부는 올해 국가 R&D 예산을 크게 늘리고, R&D 투자의 내용과 절차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R&D를 통한 혁신역량 강화와 성장동력 확충은 정부의 국정 목표다. 우리나라의 R&D 역량과 투자 규모 및 성과 등을 살펴보고, 코로나19 사태 경제활력 회복에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알아본다.
획기적으로 강화된 R&D 투자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한국을 돋보이게 했다. 독보적인 감염병 진단 기술과 정보기술(IT) 인프라 때문이다. 의심 환자를 추적, 진단, 격리, 관리하는 속도와 정밀도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다. 바이오헬스, 5세대(5G) 이동통신,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에 축적된 연구개발(R&D) 성과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꽃피는 것이다. R&D 투자는 ‘미래를 위한 씨앗’이다.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생산성 향상의 밑거름이자 국가 혁신역량 제고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게 R&D 투자다. 시장과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 국민 일상생활에도 다양한 편익으로 나타난다.
정부의 R&D 사업 예산은 2019년에 사상 최초로 20조 원을 돌파했다. 올해 예산은 전년 대비 18%나 증가한 24조 2000억 원에 이른다. 이는 정부 지출 총예산(9.1% 증가)보다 두 배 높은 증가율이다. 국가 R&D 예산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2010년(11.0%)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R&D 예산의 큰 증액에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자립화 촉진,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체질 개선과 미래 성장동력 확충, 나아가 혁신성장의 성과 확산을 뒷받침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R&D 생태계에도 혁신의 바람이 분다. 세계 최초 또는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R&D 과제를 선정해 전략적 투자에 집중하고, 실패 위험이 높더라도 혁신적인 제품과 기술개발에 과감히 도전하며, 부처 간 칸막이를 걷어낸 가운데 산학연과 민관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협업형 R&D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민관 과감한 투자로 ‘R&D 강국’ 실현
투자 규모나 인적 자원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전 세계에서 ‘R&D 강국’으로 꼽힌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분석에 따르면, 공공과 민간 부문을 합친 우리나라의 R&D 투자 총액은 2018년 기준 85조 7287억 원에 이른다. 이는 2017년보다 8.8% 늘어난 것으로, 2018년 경제성장률 2.7%에 견줘 R&D 투자 증가율이 세 배가량 더 높다. 경제 성장세가 둔화한 가운데도 미래 성장기반 확충과 혁신을 위한 R&D에는 정부와 민간 모두 더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다는 증거다.
또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2018년 기준 4.81%로 미국(2.79%, 2017년 기준), 일본(3.21%), 독일(3.04%) 등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높은 세계 1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국가별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 추이를 보면, 우리나라는 2016년 이스라엘에 1위 자리를 잠시 내줬다가 2017년부터 다시 확고한 1위로 올라섰다. R&D 인적 역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학, 연구기관, 기업체 등에서 상근직으로 일하는 연구원 수는 2018년 기준 모두 40만 8370명으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경제활동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14.7명)에서는 세계 1위, 인구 10만 명당 특허출원 수는 세계 3위다.
R&D 투자 확대와 인적 자원의 확충은 단기적인 경제활력 제고에는 큰 효과가 없다. 성장 잠재력을 키우고 긴 안목으로 혁신 역량을 높이기 위해 R&D에 힘을 쏟는 것이다. R&D 투자는 세계 어디에서나 시장이 아니라 공공 주도로 이뤄진다. 시장의 민간 기업은 투자의 불확실성이나 실패의 위험을 감당하기 힘들다. 헌법 제127조 1항은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기본법 제4조에도 ‘국가는 과학기술 혁신과 이를 통한 경제·사회 발전을 위하여 종합적인 시책을 세우고 추진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출범 초부터 R&D 투자를 국가적 과제로 여기고 꾸준히 확대, 강화했다. 이에 힘입어 혁신성장을 위한 한국의 기초체력과 산업 역량이 2017년부터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전 세계 142개 국가를 상대로 산출하는 국가경쟁력지수는 2017년 이후 해마다 두 계단씩 상승해 2019년에는 세계 13위까지 올랐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과학 인프라 경쟁력 순위는 2018년 세계 7위에서 2019년 3위로 높아졌다.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의 기술 자립화를 빠르게 이루는 것도 그동안 쌓은 R&D의 힘이다.
R&D 예산 3대 중점 육성 산업 등 집중 투입
24조 2000억 원 규모로 짜인 2020년 R&D 예산은 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AI) 이른바 ‘DNA’ 인프라와 시스템반도체·미래형 자동차·바이오헬스 등 3대 중점 육성 산업에 집중 투입된다. DNA 핵심 인프라의 고도화에는 약 5000억 원, 3대 육성 산업의 R&D 사업에는 약 1조 7000억 원을 올해 안에 투자한다.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기술개발과 융복합 의료기기 기술개발에는 올해 처음으로 각각 900여억 원 규모의 신규 R&D 사업 예산이 편성됐다. 수소경제 활성화와 신재생에너지 개발 촉진을 위한 R&D 과제와 예산도 전반적으로 늘었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R&D에는 100개 핵심 품목의 5년 내 공급 안정화를 목표로, 올해 1조 7000여억 원을 비롯해 2022년까지 짜인 예산이 5조 원 이상이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선정한 R&D 분야에 대해서는 기술과 정책, 제도 등을 종합적으로 연계한 ‘패키지 투자 시스템’을 적용한다. 부처 간 칸막이를 두지 않고 협업과 융합으로 R&D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연구 성과의 사업화와 민간 확산을 촉진하려면 개방형 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이에 따라 R&D 정책 주관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부처와 기관마다 각기 다른 R&D 법령과 지침 등의 정비에 나서기로 했다. 부처 간 R&D 정보와 데이터 공유를 위해 연구지원 시스템의 통합도 올해부터 추진해 내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R&D 사업의 부처 간 협업과 패키지 투자 시스템이 적용되는 대표적인 분야는 DNA 기반의 산업이다. 정부는 2020년 1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데이터 3법’의 효과가 관련 산업과 국민 일상생활에 조속히 가시화할 수 있도록 과기정통부를 중심으로 각종 빅데이터 플랫폼(빅데이터 분석·활용에 필요한 인프라)의 고도화 투자를 확대한다. 2019년 말 현재 1450가지인 개방 대상 데이터를 올해 연말까지 3094가지로 늘리고, 다양한 데이터 플랫폼과 센터를 연결해 데이터 거래소를 육성한다.
또 분야별로 민간의 데이터 지도 구축을 지원해 데이터 생산·유통·활용을 촉진할 방침이다. 정부는 5G 네트워크의 확대에 ‘망투자 세액공제 확대(1%→2%), 주파수 이용료 부과체계 통합, 신설 5G 기지국에 대한 등록면허세 감면’ 등 3대 지원 패키지를 적용해 2022년까지 민관 합동으로 30조 원의 투자가 이뤄지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올해 1월 출범한 2기 그랜드챌린지위원회 위원들| 산업통상자원부
5G 기반 실감 콘텐츠 개발 협업 강화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확장현실(XR) 등 5G 기반의 실감 콘텐츠 개발도 연관 산업부터 문화·예술, 건설, 국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접목을 위해 여러 부처 간 사업 연계와 협업이 강화된다.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개발은 과기정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의 협업으로 추진하는 AI 관련 R&D 사업이다. 올해부터 2029년까지 과기부는 설계와 소자 기술개발에 4880억 원, 산업부는 장비와 공정 기술개발에 5216억 원의 사업 예산을 이미 확정했다.
사람의 뇌 구조와 같은 메모리 중심의 컴퓨팅이 가능한 AI 전용 반도체 개발에도 두 부처가 올해부터 착수한다. AI와 블록체인 등 디지털 신기술의 개발 과제는 전체 부처와 공공기관의 서비스 혁신으로도 이어진다. 구체적인 사례로 AI 기반의 안면 식별 및 추적 시스템, 자율주행 이동우체국,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신분증 플랫폼 등이 공공서비스 혁신을 위한 R&D 과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실패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혁신적인 R&D가 가능하다. 성공 가능성과 실적을 중시하는 R&D 틀을 벗어나야 모험적인 도전에 나설 수 있다. 이런 도전을 응원하는 정부의 R&D 지원사업이 ‘알키미스트(Alchemist) 프로젝트’다. ‘연금술사’라는 뜻인 알키미스트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철로 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황산·질산 등을 발견해 결과적으로 화학 발전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 착안, 산업부가 성공 여부를 따지지 않고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기술개발에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2019년 처음 도입했다.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그랜드챌린지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연구 주제와 과제를 선정하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는 2020년 10개 주제에 60개 안팎의 과제를 선정해 118억 원을 지원한다. 산업부 관계자는 “우리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리던 자율주행차가 이제 더는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처럼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는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혁신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R&D 사업의 추진 방식과 절차, 성과 관리에서는 연구 현장과 수요자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년간 ‘사람중심의 과학기술’을 표방하며 현장 연구자 주도형 기초연구를 강조했다. 연구 주제와 기간, 연구비를 연구자가 자율적으로 직접 제시해 공모하는 기초연구 예산은 올해도 19%나 늘어난 2조 300억 원이 책정됐다. 또 박사후 연구원(포닥 연구자)이 연구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이동하는 가칭 ‘세종과학 펠로우십’ 과정을 개설해 젊은 연구자 1000여 명에게 자율적이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
지방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R&D에는 정부가 묶음예산(블록펀딩)으로 지원하고, 공공기술과 장비 등을 기업에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개방형 연구실(오픈랩)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블록펀딩이란 정부가 큰 틀에서 연구 방향과 지원 예산 총액만 결정하고 예산 집행의 자율권은 과제 수행 주체에게 주는 지원 방식이다.
R&D 성과의 실수요자인 기업에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며, 원천기술 R&D의 경우 완료된 과제에 대한 최종 평가와 후속 상용화 연구 과제의 채택 여부를 기업이 주도하는 평가단을 구성해 결정한다. 중소기업 R&D는 ‘기업가치 제고’와 ‘혁신 중소기업 발굴’이라는 지원 목표를 명확히 해, 단계별 연계 지원과 맞춤형 평가관리를 강화한다.
국민 참여형 R&D도 활성화 전망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 참여형 R&D도 올해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보인다. 4대 공공 수요(국민 생활, 재난 안전, 복지 증진, 도시 환경)에 관련된 중앙 부처와 광역 자치단체는 민간 전문가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사회이슈 발굴단’을 구성해 운영하며, 여기에서 발굴된 현안 과제들의 해결을 위한 R&D가 확대된다. 특정 지역의 문제를 다루는 R&D 사업은 지자체와 주민이 수요 발굴부터 기획, 기술개발, 현장 적응 단계에까지 참여하는 것을 보장한다.
과기정통부는 사회적 문제를 41개 영역별로 나눠 경험·지식·연구 성과 등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지역과 주제별로 다양한 리빙랩(사용자 참여형 프로그램) 자료를 제공한다. 또 올해 상반기 중 범정부 차원의 ‘디지털 포용전략’을 마련해 정보통신기술(ICT) 개발 및 발전의 효과가 계층과 지역 등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퍼질 수 있도록 하고, 국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최기영 과기정통부 장관은 올해 업무보고에서 R&D 정책의 속도감 있는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고, 나아가 국민 모두가 함께 잘사는 미래를 열겠다”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