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채, 199×162.5cm, 1614~1620.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 소장
서양 미술사에서 인정하는 최초의 여성 화가는 17세기에 등장했다. 미술사에 등재된 1호 여성 화가는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난 그녀의 공식적인 사망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나폴리에 머물던 1650년 이후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정황상 1652년에서 1656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의 작품 성향은 그의 삶과 궤적을 같이한다’는 말은 젠틸레스키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강렬한 명암 대비와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 극적인 연출 효과가 특징인 바로크미술 시대에 활동한 젠틸레스키는 화가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그림과 친숙한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젠틸레스키는 불과 17세의 나이에 깜짝 놀랄 만한 그림을 그려 화가의 길을 예고했다.
1610년에 그린 ‘수산나와 두 장로’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두 장로가 수산나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으로 딸의 재능을 확신한 젠틸레스키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동료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사사를 부탁하는데, 아뿔싸!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달이 난 것은 1612년, 젠틸레스키의 나이 19세 때였다.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
젠틸레스키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데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화단의 대선배인 타시는 자신의 화실에서 그녀에게 그림 교습을 하던 어느 날, 꽃다운 나이인 제자를 짓밟고 만 것이다. 젠틸레스키가 받은 충격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마는 미래의 거장은 역시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다져온 불꽃같은 의지 앞에서 타시의 만행은 외려 강력한 예술적 자극이 됐다.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 페미니즘의 시조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남성 일색인 화가 집단에서 여성 화가는 배척당하기 일쑤였고, 후원자는 언감생심인 시대였다. 이런 악조건 아래서 성폭행 피해를 창작의 동기와 창작 욕구를 쉼 없이 담금질하는 자극제로 삼은 끝에 피렌체 미술아카데미 사상 첫 여성 회원의 영예를 안은 젠틸레스키의 역발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개척한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다. 제목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그림이다. 신화와 성경에 나오는 억압받는 여성을 주된 소재로 삼은 젠틸레스키의 대표작인 이 그림은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가장 실감 나게 구현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에 소장 중인 그림은 이스라엘의 매혹적인 과부 유디트가 조국을 침공한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뒤 하녀의 도움을 받아 그의 목을 잔인하게 베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다. 16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빛과 어둠의 화가’ 카라바조(1571경~1610)의 화풍을 가장 완벽하게 계승 발전시켰다는 젠틸레스키의 위대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614년에서 162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로 199cm, 가로 162.5cm 크기의 대형 캔버스 유화 작품으로 구약성경 외경 유디트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배경이다. 기원전 6세기 옛 이스라엘의 산악도시 베툴리아에 미모의 젊은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디트. 화면 오른쪽의 여성이다. 가운데 여성은 유디트의 하녀. 유디트와 하녀가 힘을 합쳐 칼로 목을 베고 있는 남자는 홀로페르네스. 유디트의 조국 이스라엘을 침공한 아시리아의 장군이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캔버스에 유화, 145×195cm, 1598~1599. 로마 국립회화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
카라바조의 성향인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로 살해 장면의 연출 효과를 극대화한 이 그림을 화가는 왜 그렸을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행위 이전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관문인 베툴리아 침공이 선결 조건. 홀로페르네스가 이끄는 무지막지한 아시리아 군대는 베툴리아 코앞에서 주둔하며 공격 준비를 마친 상태. 초읽기에 들어간 전쟁의 승부는 보나마나. 이때 유디트는 조국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묘책을 승부수로 던진다. 이른바 미인계 전략. 하녀를 대동하고 적장의 소굴로 들어간 유디트는 화려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성공한다. 야릇한 꿈에 부푼 홀로페르네스는 호위병도 물리치고 만취한 채 마침내 잠에 곯아떨어진다. 유디트가 적장의 칼을 뽑아 들고 홀로페르네스가 꿈꾼 거사와는 전혀 다른 거사를 단행한다. 행여 거사가 실패할까, 하녀는 온 힘을 다해 홀로페르네스의 상체를 짓눌러 그의 반항을 무력화한다. 잘려나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유디트는 참수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툴리아성 밖에 내걸었고, 이를 본 아시리아 군사들이 줄행랑을 쳤다.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으로 유디트가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 속 이 이야기는 젠틸레스키 외의 다른 화가들도 단골 소재로 삼았는데, 그중 카라바조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동일한 제목으로 로마 국립회화박물관에 소장된 카라바조의 그림은 보다시피 젠틸레스키의 그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가운데 인물이 유디트다. 억센 팔뚝과 거사 의지가 결연한 젠틸레스키 작품 속 유디트와 달리 가냘픈 모습에 잔뜩 겁먹은 얼굴이다. 오른쪽의 하녀도 노파로 거사에 어떤 동참도 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당한 상처를 유디트로 투영한 젠틸레스키와 그렇지 않은 카라바조의 차이다. 젠틸레스키 그림 속의 유디트는 젠틸레스키 본인이고, 홀로페르네스는 젠틸레스키를 덮친 타시가 아닐까.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