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20년 차 개발자 겸 투자자가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조차 어려워.”
12년 차 편집자가 말했다.
“선배, 3년 뒤에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3년 차 마케터가 말했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이 다른 곳에는 아예 없는 일이에요.”
2년 차 디자이너가 말했다.
“저는 디자인도 하고 콘텐츠 기획도 하고 프로듀서(PD)도 하는데, 근데 저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요?”
막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음악가가 말했다.
“저는 뮤지션인데 마케터이기도 하고, 제 음반의 프로듀서이자 대표이기도 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장편·단편 소설집을 여러 권 낸 소설가가 말했다.
“소설가도 영업을 해. 그렇게 글 쓰는 나, 방송하는 나, 생활하는 나는 모두 다르지만, 또 모두 같기도 해. 사실 나를 설명하는 게 제일 어려워.”
최근 몇 개월 동안 만난 사람들과 나눴던 얘기들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기자인가, 평론가인가, 기획자인가, 반백수인가, 가정용 장식품인가? 잘 생각해보면 나를 설명할 직업을 한 단어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답을 아직도 못 찾았다. 그래서 페이스북 프로필에는 ‘가정용 장식품’으로, 쓰는 글에는 ‘음악평론가’로, 어떤 경우엔 ‘문화평론가’나 ‘콘텐츠 기획자’로 썼다.
그 한 단어를 찾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2005년 무렵부터 이런 고민을 했으니 거의 15년을 고민한 셈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혼란은 세상이 변하는 중이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닐까? 세상이 변하면서 업종이든 역할이든 정체성이든 온갖 것의 경계가 흐릿해지니까 이렇게 헷갈리는구나. (젠장!)”
어쩔 수 없이 경계에 선 사람들
지금은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이 시점에서, 플랫폼(다양한 정보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기반 서비스)과 콘텐츠가 서로 뒤섞이고 경쟁하는 업계에서, 언론사와 블로그가 미디어의 역할을 두고 경쟁하는 시점에서, 일의 정의가 달라지는 환경에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헷갈린다.
그렇다고 없던 개념을 스스로 만들기는 어렵다. 또 그게 정확하지도 않다.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모두 혼란만 더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답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그렇게 믿는다. 물론 그 답은 다시 수정되겠지만, 그래도 계속 고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다는 걸 확인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걸, 적어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한반도에만 10만 명 정도 있다고 생각하면 적잖이 위안이 된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한다. 나를 포함해 우리가 경계에 있다면, 그때 필요한 건 뭘까. 상식적으로 균형일 것이다. 중심을 잘 잡기 위해선 또 뭐가 필요할까. 앞뒤 좌우를 잘 봐야 할 것이다. 보는 것, 그러니까 ‘관점’이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서 본다는 것을 재정의한다. 서양 문화에서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이다. 이 지식은 사유를 통해 더욱 확장되어 지혜로 발전한다. 그래서 존 버거는 보이는 대상 이면의 무언가를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게 보는 것은 다시 말해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정체성을 다르게 보려면 주변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단지 직업, 산업, 정보통신, 젠더(사회적 의미의 성별)를 이해하는 방식뿐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해보는 일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관점’이란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훈련에는 선생이나 명인(마스터)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방법’을 배우고 익힌다. 이때 오직 마스터를 따라 하는 행태는 발전을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마스터를 따라 하는 과정을 거치며 내게 맞는 방법을 새로 찾거나 만들게 된다. 훈련이란 바로 그런 과정이다. 내게 맞는 방법을 찾을 것. 나를 다시 이해할 것. 그러니까, 나를 찾을 것. 그러다 보면 ‘경계’라는 개념도 달라진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어떤 선이다.
이 선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 선을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하며 노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나는 이걸 ‘서핑’이라 부르는데 서퍼들이 파도를 거스르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타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파도는 타고 노는 것이다. 경계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타고 넘나들며 놀 수 있을 때,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답이 아닌 힌트다. 관점을 만드는 데 참고할 만한 사례들과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기만적인 자기 계발과는 다른 동기와 힌트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경계를 타고 노는 사람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면 어떨까? 경계를 타고 노는 사람들, 아니 일단 ‘내가 누군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사실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저 더 크게 성공하고 싶거나, 더 큰 명성을 얻고 싶은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생활양식(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로 향하는 게 아닐까.
내가 하는 일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내 관점을 만드는 일이고,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중요한 건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포기하거나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공지능과 테크놀로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다시 말해 본질과 현상이 혼재된 상황을 잘 헤쳐나가는 일이 아닐까. 세상의 경계인들을 응원한다.
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