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다. 4·19부터 촛불혁명까지 민주화의 역사 60년에는 세 번의 승리한 시민혁명이 자리한다. 1960년의 4·19. 부정선거를 자행한 책임을 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1987년의 6·10민주항쟁.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국민적 저항에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했다. 2016년 가을부터 촛불로 거리를 밝힌 1700만 명 국민의 요구는 2017년 봄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을 이끌어낸 주역은 바로 국민이었다. 국민은 자신에게 주권이 있으며 이를 스스로 수호한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자신의 주권을 위임하는 데 결코 만족하지 않고 국민 스스로 주권재민 의식을 실천했기에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6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세 번의 시민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4·19혁명의 발단이 된 것은 3·15부정선거였다. 그것은 국민의 참정권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였다. 1898년 독립협회 주도로 의회 개설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인 채로 막을 내렸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동안 참정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들에 명문화되어 이어져 내려왔고, 나라를 잃은 민족은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로 선거권, 피선거권 등을 포함한 민주적 절차를 훈련하며 참정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 독립의 그날을 꿈꿨다. 이런 열망은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의원 선거에서 95.5%라는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다. 이처럼 국민에게 참정권은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소중한 권리였다.
참정의 권리가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
1960년 이승만정부는 국민이 식민지배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누리게 된 소중한 참정의 권리, 즉 주권재민을 확인하고자 하는 정서를 가벼이 여기고 제4대 대통령·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여당인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완장 부대를 동원한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 계산서 조작 등 각종 부정선거 방법을 모의했다.
무리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월 28일은 일요일인데 대구에서는 야당인 민주당 유세에 가지 못하게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켰다. 이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거리에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1960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는 참정권이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임을 강조하며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국민의 주권 행사가 공명정대하게 이뤄지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에는 서울의 야간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가 명시된 유인물을 나눠주며 시위했다.
3월 15일 예상대로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이뤄지자 전국 곳곳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27일 만인 4월 11일 마산에서 실종된 고등학생인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분노한 마산 시민 2만여 명은 마산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했고 파출소를 습격했다. 이날 처음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정권 퇴진 구호가 등장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 역적 몰아내자’며 시위를 벌이고 돌아가다 깡패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9일 아침 고려대 학생 습격 사건을 조간신문으로 접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가세했다. 10만여 명이 시내를 채운 채 시위를 벌이던 중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발포했다. 부산과 광주에서도 발포가 일어나면서 이날 시위로 전국에서 100명이 넘는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이날을 사람들은 ‘피의 화요일’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6일 후인 4월 25일 서울에서 대학교수 258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전국에서도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마산에서는 할머니 시위대가 등장해 “죽은 학생 책임지고 이 대통령 물러가라”고 외쳤다.
‘피의 화요일’에서 ‘승리의 화요일’로
다음 날인 4월 26일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 학생들과 시민들이 광화문 일대로 몰려들었다. 오전 9시 45분경에는 탑골공원에서 “부숴버리자”라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이승만 동상이 끌어내려졌다. 시위대가 10만 명으로 불어난 가운데 10시 20분경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 면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승리의 화요일’이 온 것이다. 그날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할 것,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국민의 주권재민 의식과 참정권에 대한 정서를 가볍게 여긴 이승만 정부는 그렇게 거대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무너졌다.
1960년 4·19혁명으로부터 60년, 그 세월 동안 국민은 광장에서 스스로 주권재민을 실현하는 시민혁명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진정한 주권재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던진 희생자들 덕분이었다. 승리의 역사 속에 묻힌 희생의 역사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국민에 의한 주권재민 실현의 시작점인 4·19혁명의 의미를 짚어본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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