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 없는 세상

2020.03.30 최신호 보기

▶<뉴요커> 2020년 3월 30일자 표지

작년부터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비교적 신경이 덜 쓰이는 반려동물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막상 키워보니 고양이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았다.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자꾸 옆으로 와서 놀아달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소리와 눈빛으로 나를 압박한다. 고양이는 무료한 상태를 참지 못하는 듯했다. 고양이에게 무료함이란 무엇일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다. 고양이는 사냥 본능이 있어서 하루에 몇 번씩 사냥 놀이를 해줘야 한다. 사냥 놀이는 장난감을 흔들어서 마치 그것이 사냥감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양이 장난감은 막대기고 그 끝에 깃털이 달려 있다. 그것을 흔들어주기만 하면 몸을 웅크리고 긴장하며 공격 준비를 한다. 그러다 막대기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 즉 움직이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친다.
고양이를 미물이라 치부하지만 사람도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사람도 고양이와 똑같은 생존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도 움직이는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맹수이거나 사람이 사냥해야 할 사냥감이다. 그것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개체는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그 존재가 무엇인지 밝히면 뇌에서 도파민을 분출해 기분을 좋게 해준다. 생존을 위한 일종의 보상 시스템이다. 그런 움직임에 무딘 사람은 이미 맹수에게 목숨을 빼앗기거나 굶어 죽음으로써 그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모든 존재는 움직임에 매우 예민한 생명체인 셈이다.

▶(왼쪽부터)필립 존슨이 디자인한 글라스 하우스의 인테리어 사진/이케아 카탈로그 표지, 2019년

사람들이 모두 떠난 초현실적 도시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공공시설과 상업 공간, 각종 스포츠 경기장, 심지어는 거리조차 움직임이 뜸해졌다. 3월 30일자 <뉴요커> 표지는 텅 빈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그림을 실었다. 이렇게 사람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아주 드문 도시의 텅 빈 모습을 찍은 사진을 전 세계 언론사들이 앞다퉈 내놓고 있다. 대단히 예외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흔히 ‘초현실적’이라고 묘사한다.
예를 들면, 사진기를 발명한 루이 자크 다게르가 1838년에 찍은 초기 사진이 그렇다. 대낮에 파리 탕플(Temple)가를 찍었는데,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당시 사진기는 렌즈와 필름이 빛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무려 20~30분의 노출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움직이는 행인과 말, 마차는 필름에 빛의 흔적을 남기기에는 너무 빨랐던 것이다. 움직일 수 없었던 단 두 사람, 구두를 닦는 사람과 그에게 구두를 맡긴 사람만이 사진에 나왔다. 거리를 가득 메워야 할 어떤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오직 건물과 나무만이 눈에 들어올 때 그 도시는 적막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대낮 도시의 적막이라는 아이러니가 초현실적 분위기를 낳는 것이다.
이런 적막함을 즐겨 찍은 대표적인 사진가로 외젠 아제(Euge?ne Atget)가 있다. 그는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이른 아침에 주로 사진을 찍어 거리가 텅 비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아제의 파리 사진들은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라고 평가했다. 아제의 파리 사진들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그 매혹이란 고요함과 쓸쓸함, 그에 따른 왠지 모를 불안에서 온다. 사람이 없으므로 변화와 생동감이 없다. 아제가 1899년에 찍은 드라공 거리는 사람들이 떠난 삭막한 도시를 보는 듯해서 초현실적이다.
사람을 배제하는 대표적인 사진 장르는 건축 전문 사진이다. 건축 사진에서는 건물의 형태와 표면, 비례, 실내의 가구, 조명, 바닥재, 커튼, 장식 등이 주인공이다. 사진 속에 사람이 등장할 경우 그것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이므로 순수하게 건축만 감상할 수 있게 가능한 한 사람을 빼는 것이다. 건축 사진집을 계속 보고 있으면, 거대한 건물을 미술관의 오브제(상징적 기능의 물체)처럼 다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건물 외관 사진은 사진가가 완벽하게 건물 주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 사람이 사진에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통제가 가능한 인테리어 사진은 철저하게 사람을 배제한다.

▶(왼쪽부터)‘탕플가의 모습’,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 1838년/‘렌가 50번지, 드라공 거리’, 외젠아제, 1899년

변화와 생동감이 없는 박제의 이미지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디자인한 유명한 글라스 하우스의 공간 사진을 보자. 이런 종류의 전문적인 인테리어 사진은 대단히 세련되었다. 동시에 상당히 공허한 느낌도 받는다. 마땅히 사람이 있어야 할 장소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의 물건들은 너무나 반듯하고 깨끗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모든 사물의 가로세로가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찍혀 있다. 질서가 강박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순수한 진공의 상태를 보는 듯하다. 그로 인해 사람의 흔적이 더욱더 완벽하게 제거된다. 사람이 없더라도 모자나 장갑, 파이프, 책 등이 우연한 모습으로 놓여 있으면 사진 속에서 인적을 느낄 것이다. 그것마저 없앤 것이다. 이런 인테리어 사진은 매혹적인 사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을 예외적이라고 전제할 때 매혹적이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변화와 생동감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차가운 이미지, 나아가 박제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것을 잘 아는 가구 브랜드들은 카탈로그를 만들 때 특별한 방법을 쓴다. 각각의 아이템은 그 물건을 건조하게 찍지만, 표지 사진에는 가구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된 공간을 배경으로 그곳을 점유한 사람들(더 정확히 말하면 가족)을 반드시 등장시킨다. 사람이 있는 공간 속에서 독자는 안정감과 행복을 느끼며, 그로부터 구매 욕구가 더 생기기 때문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서 흔히 보는 텅 빈 거리, 관람객 없는 축구장, 관객 없는 극장, 손님 없는 열차 사진에서 깨닫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 평소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그 당연한 현상이 사람을 매우 안정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뭔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우리의 몸은 그것을 끊임없이 느낀다. 주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한 우리의 의식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깨어나고, 그 깨어난 의식이 살아 있음의 존재 방식이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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