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북 프로 16인치 /아이폰 11 프로/ 아이패드 프로 3세대
최근 애플의 행보가 흥미롭다. 지난 몇 개월간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 3세대와 맥북 프로 16인치, 그리고 아이폰 11 프로 모델을 발표했는데 모두 비싼 기계들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은 애플이 폭리를 얻거나 명품 브랜드 전략을 취한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애플은 콘텐츠 생태계의 가장 기본 단위인 ‘창작’의 영역을 겨냥한다.
어떤 분야건 산업 생태계는 대체로 생산-유통-판매의 구조를 가진다. 시장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이 단순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급속한 기술 발전은 각 영역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유통 영역에서 변화는 시장의 폭발적 확장을 이끌었다. 먼저 교통의 발달이 있다. 철로가 생기고 고속도로가 만들어졌을 때 시장은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 당연히 수익도 늘었다.
다음엔 통신이 있었다. 라디오 전파가 유럽 대륙과 북미 대륙을 연결하자 글로벌 시장이 탄생했다. 시장이 넓어지면서 광고도 중요해졌다. 텔레비전은 음성을 영상으로 바꿨을 뿐, 본질적으로는 라디오 전파가 확장한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줬다.
출판, 음악, 영화, 방송 등 로컬의 미디어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 구조는 20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아이폰 11 프로로 촬영한 레이디 가가의 ‘스투피드 러브(Stupid Love)’ 뮤직비디오
애플이 높은 사양의 제품을 출시하는 이유
분위기가 달라진 건 2000년 이후다. 인터넷의 상용화는 모든 걸 바꿨다. 음성, 영상, 이미지, 문서(텍스트)를 모두 디지털 형식(포맷)으로 전송할 수 있는 이 새로운 통신망은 거의 모든 영역의 산업구조에 영향을 줬다. 역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유통이다. 출판, 음악, 영화, 방송 등은 디지털 포맷으로 변경되어 물리적 조건 없이 전송되고 공유되었다. 책, 음반, 비디오 등은 손에 잡히지 않는 콘텐츠가 되어 가상공간에 쌓였다. 인터넷 혁명은 사실상 유통의 혁명이었다. 유통 구조가 바뀌자 새로운 사업자도 등장했다. 2010년 이전까지 음악의 가장 큰 유통 사업자는 월마트였다. 그런데 애플이 아이팟과 아이튠즈를 내놓으면서 우승자가 바뀌었다. 애플은 하드웨어 판매에 음원 유통까지 결합하면서 음악 산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2015년이 지나면서 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내려받기(다운로드)가 시들해지고 실시간 재생(스트리밍)이 대세가 된 것이다.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대다수가 개인화된 미디어를 가지게 되자 그들에게 콘텐츠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동안은 하드웨어의 성능이 중요했다. 누가 더 빠르고, 누가 더 아름답고, 누가 더 저장 공간이 많은지를 경쟁했지만 몇 년 뒤에는 성능 자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하드웨어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의 품질이 중요해졌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애플의 고민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최근 애플이 출시한 제품들은 개인용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고성능이다. 가격도 비싸다. 맥북 프로 16은 기본 사양이 316만 원이다. 아이폰 11 프로는 64GB 155만 원, 256GB 176만 원, 512GB는 무려 203만 원이다. 개인이 구입하기엔 조금 망설여진다. 특히 아이폰 11 프로는 카메라 성능이 좋아졌을 뿐 실제 사용에는 기존 제품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반려동물의 귀여운 순간이나 멋진 여행지에서 동영상을 찍기 위해 2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애플이 이런 높은 사양의 제품을 출시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최근 레이디 가가는 아이폰 11 프로로 자신의 새 싱글인 ‘스투피드 러브(Stupid Love)’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2019년에는 셀레나 고메즈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너를 포기해야 했어(Lose You to Love Me)’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아이폰 11 프로의 ‘눈싸움 광고’는 <데드풀>의 데이비드 리치 감독이 촬영했다. 아이패드 프로 3세대는 예술가들을 위한 도구로 자리 잡았고, 맥북 프로 16은 현존하는 최강의 편집 기기로 이해되고 있다. 아이폰 11 프로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대신할 수 있는 휴대용 기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애플의 신제품은 모두 창작(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이 가능한 창의적인 도구(크리에이티브 툴)인 셈이다.
▶<데드풀>의 데이비드 리치 감독이 아이폰 11 프로로 촬영한 ‘눈싸움 광고’
콘텐츠 산업의 모든 단계에 ‘애플’이 존재
앞서 언급한 산업 생태계의 생산-유통-판매 구조에서 창작 콘텐츠는 생산 영역에 놓인다. 창작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정확히 구현할 수 있는 도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기기는 비싸진다. 게다가 삽화나 사진보다 영상은 장비 비용이 더 비싸다. 그래서 보통 이런 촬영, 음향 장비는 대여 시장을 형성한다. 관련 장비를 시간 단위로 대여해 사용하는 것이다. 시간과 노력 등 보이지 않는 자원(리소스)이 투입된다. 창작자로서는 이 비용도 제작비에 포함시키기 마련이다. 그만큼 창작의 영역에서는 자원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애플은 바로 이런 창작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같다. 최근 애플은 다운로드 사업을 정리하고 스트리밍 서비스인 애플 TV플러스를 출시했다. 디즈니 플러스,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등과 경쟁하는 서비스다. 그런데 애플은 애플 TV플러스를 통해 스트리밍 생태계의 지배 권력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팟과 아이튠즈가 유통 생태계를 재구성했듯 고사양의 컴퓨팅 하드웨어들과 애플 TV플러스, 앱스토어 생태계를 모두 연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음악이든 영상이든, 콘텐츠 산업의 생산(창작)-유통-판매의 모든 단계에 ‘애플’이 존재하게 된다. 사실 현재의 플랫폼 비즈니스(사업자가 구축한 망에 소비자가 언제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 사업 형태)는 이런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애쓰는 중인데, 애플은 좀 더 빨리, 단계적으로 이 구조의 완성형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콘텐츠 사업 관점에서 애플은 한마디로 ‘창작(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차우진_ 음악평론가. 미디어 환경과 문화 수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춘의 사운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H.O.T.부터 소녀시대까지…> <한국의 인디 레이블> 등의 책을 썼고, 유료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 <음악 산업, 판이 달라진다> 리포트를 발행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