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으로 살아가기

2020.03.23 최신호 보기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의 책 <정치적 감정: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그리는 사회는 각각의 개인을 타인의 목표나 결과를 위한 수단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회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는 좀 더 큰 사회적 결과나 높은 평균을 창출하기 위해 특정한 시민 집단을 극단적으로 비참한 삶에 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곳이다. 또한 남성들만이 당당한 시민이 되고 여성들은 이들을 보완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도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회다. 권리와 이익의 분배는 몹시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렇듯 긴 인용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는 사회’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정치적 감정>에서 그려내는 우리의 사회는 바로 그 ‘사회’라는 것이 형성될 때부터 현재까지 줄곧 다른 모습으로 유지돼왔다. 특정한 시민 집단은 극단적으로 비참한 삶에 처하게 내버려졌으며, 여성은 남성을 보완하는 대상으로 규정되고 배제돼왔다.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참된 여성성’은 시대마다 남성을 보완하는 대상으로서 본질을 유지하며 조금씩 그 세부 항목이 달랐는데, 남성들 또한 시대에 따라 요구받는 ‘참된 남성성’이 같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성들이 남성들을 보완해주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명제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비참한 삶에 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삶에 처한 시민 집단을 이 사회에서 아주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모른 척하면 된다.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거짓으로 살아가는 방편 중 하나다.
‘참된 여성성’에 대해서는 좀 더 문제가 복잡하다. ‘참된 남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화된 젠더(사회적 의미의 성별)로 존재하지 않는 구성원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분화된 젠더 말고 다양한 젠더에 대해서는 역시 모른 척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회가 부여한 ‘참된 여성성’과 ‘참된 남성성’, 아니 ‘참된’이라는 수식은 이제 ‘거짓’으로 바뀌어 마땅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가 부여한 ‘거짓 여성성’과 ‘거짓 남성성’에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지배당했다. 그리하여 ‘거짓 여성성’과 ‘거짓 남성성’에서 벗어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을 보면 화들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니까 여성성과 남성성을 벗어던지고, 고유한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이제껏 충실하게 가꾼 자신의 삶을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젠더의 출현을 쉽게 모른 척하지 못한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여러 쟁점에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의견을 낼 수 있다. 우선, 전쟁에 반대할 수 있다.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단 체제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통일에 찬성할 수 있다. 물론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동성 결혼에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에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여성이 할 수 없는 일과 남성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다. 우리의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자 하고 어딘가에 잘못 쓰이는 세금에 대해 반대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위의 항목들에 대해 각자 의견을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전쟁의 참혹함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은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에 찬성하는 사람은 시민이 누리는 권리와 혜택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그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모른 척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의견도 갖지 않는 사람은 그저 자신과 무관해서일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서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삶과 무관하게 되었을까? 어째서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유진목_ 시인. 2016년 시집 <연애의 책>을 낸 이후 시집 <식물원>, 산문집 <교실의 시> <책이 모인 모서리 여섯 책방 이야기> 등을 썼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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