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 주제, 놀라운 구성력, 압도적 관찰력

2020.03.23 최신호 보기

▶피터르 브뤼헐, ‘농가의 결혼 잔치’, 나무판자에 유채, 114×164cm, 1568.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풍속화는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습, 행사 등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 점에서 풍속화야말로 그 시대와 사회의 참모습과 정신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풍속화가 독립적인 주제로 부각된 때는 16세기 후반 무렵이다. 독립성의 옷을 입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최초의 순수 풍속화를 선보인 주인공은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다.
16세기,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서쪽과 프랑스 북부 일대를 아우르는 플랑드르 지역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드높인 그는 풍속화를 하나의 미술 장르로 독립시킨 풍속화의 개척자다. 주로 농민들의 생활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농부의 화가’로 불린 그가 남긴 대표작이 바로 ‘농가의 결혼 잔치’(1568)다. 이 그림은 농가에서 벌어진 결혼식 피로연을 묘사한 것으로 하층민인 농민들의 일상을 그림의 단독 주제로 삼아 본격적인 풍속화 시대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파격적인 주제 선정과 함께 놀라운 구성력, 압도적인 관찰력 덕분에 미술사에 길이 남을 보석 같은 작품으로 칭송된다. 브뤼헐이 가장 먼저 발을 디딘 풍속화라는 미술 장르의 신대륙은 이후 북유럽 화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17세기 풍속화와 풍경화가 번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7세기 풍속화와 풍경화가 번창하는 계기
1525년경 네덜란드 브라반트공국 브레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브뤼헐은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안트베르펜과 브뤼셀, 두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삶의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1569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 45점의 작품이 그의 업적으로 확인된 상태다.
브뤼헐(Brueghel)이라는 성(性)이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브뤼헐은 자신의 작품 한 곳에 서명과 작품을 완성한 날짜를 꼭 기록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1559년 이후에는 이름에서 철자 ‘h’를 삭제하고 ‘Bruegel’로 서명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림의 주역이 될 수 없던 서민들의 애환을 풍자적이고 교훈적으로 담아낸 ‘농가의 결혼 잔치’ 외에 ‘눈 속의 사냥꾼’, ‘네덜란드 속담’, ‘바벨탑’ 연작, ‘거지들’,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결혼식의 꿈’, ‘장님’, ‘교수대 위의 까치’ 등의 작품을 남겼다. 두 아들(소 피터르 브뤼헐, 얀 브뤼헐)도 화가로 활동했다.
브뤼헐이 죽기 1년 전에 나무판자에 유채로 그린 이 그림은 세로 114cm, 가로 164cm 크기로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브뤼헐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서양미술사에 풍속화의 시대를 연 걸작이다.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결혼식 후 하객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피로연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피로연답게 상당히 많은 사람이 보인다. 브뤼헐 이전엔 귀족이나 상류층의 결혼을 작품으로 다룬 경우는 있었으나 하층민의 결혼식을 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림은 없었다.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
마치 우리가 그림 속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이 압권인 이 작품에는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도 어수선하거나 복잡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실내에 모여 있는 그림은 당연히 수선스럽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화면 왼쪽 입구부터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거쳐 오른쪽의 음식을 나르는 두 남자에 이르기까지 이 그림은 철저하게 대각선 구도로 짜였다. 원근감과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뛰어난 대각선 구도를 사용했기에 많은 등장인물로 인한 산만함과 복잡한 인상을 희석하는 결과를 낳았다. 화가의 계산된 의도다. 둘째, 피로연 장소의 바닥과 벽이 훤히 드러나게 묘사함으로써 공간감을 극대화한 점도 다수의 등장인물이 빚어낼 번잡한 기운을 줄이는 데 한몫한 것이다. 화가의 뛰어난 구성력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북유럽의 농촌은 가난했다. 피로연이 열리고 있는 곳도 남루한 곡식 창고다. 벽면 높게 쌓여 있는 볏짚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즐겁게 웃고 시끌벅적하게 떠들어야 할 피로연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딱딱하고 어둡고 무겁다. 그것은 늘 배고픔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촌 사람들의 힘들고 지친 일상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객들이 먹고 있는 음식도 기껏해야 빵과 수프, 포도주 정도다. 그림 아래 얼굴이 거의 덮이는 모자를 쓴 채 퍼질러 앉아 음식 찌꺼기를 핥아먹는 아이의 모습이나, 붉은색 상의의 악사가 연주에는 관심 없고 나르고 있는 음식을 쳐다보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나르는 트레이가 문짝인 것도 가난한 농촌 생활을 상징한다.
그런데 신부와 함께 피로연장에 있어야 할 신랑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 벽에 쳐 있는 푸른색 휘장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앉아 있는 여자가 신부다. 그런데 신랑은? 그림 왼쪽 아래 술병에 술을 따르고 있는 남자라거나, 음식을 식탁으로 옮기는 남자, 신부 오른편에서 세 번째 수프를 게걸스럽게 떠먹는 남자라는 설이 있으나 그림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결혼식 당일 저녁까지 신랑은 신부 앞에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당시 풍습을 그림에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식탁 맨 오른쪽 구석에는 수도사와 촌장이 앉아 그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어 결혼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음식을 나르는 문짝을 앞쪽에서 들고 있는 남자의 모자에 꽂힌 스푼과 두 악사 중 왼쪽 남자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도 생뚱맞다. 농민들의 일상을 익살스럽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가난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화가의 솜씨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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