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에 얽매이지 말라

2020.03.16 최신호 보기

▶게티이미지뱅크

초보 운전자의 운전을 생각해보자. 자동차 운전면허를 받은 뒤 처음으로 차를 몰고 출근길에 나선다. 너무 긴장해 두 팔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앞에 가는 차 꽁무니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자동차가 아무런 정체 없이 강물처럼 흐를 때는 그런대로 할 만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운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때쯤 네거리가 나온다. 앞서 가던 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고 쌩하니 달려간다. 당황하는 사이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는 것을 보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어지는 상황이 어땠는지 그는 기억할 수 없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차는 엉망으로 찌그러들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초보는 앞만 보고 운전한다. 왼쪽, 오른쪽과 머리 위에 달린 거울을 통해 뒤를 바라볼 틈이 없다. 창문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더더욱 사치다.
‘앞만 보고 달리면 위험하다. 전후좌우를 살펴봐야 사고를 피하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는 고수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실제로 운전대만 잡으면 한없이 움츠러들고 작아진다. 오로지 전방만 주시할 뿐이다.

초보 운전자와 바둑 9단의 눈으로 본 경제
네거리에서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뀔 때가 특히 위험하다. 노란불이 들어올 때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속도를 높여 교차로를 통과하든지, 아니면 브레이크를 잡아 정지하든지 순식간에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앞과 뒤의 차이다.
내가 속도를 내려고 해도 앞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나도 정지할 수밖에 없다. 앞차와 안전거리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때 절실하게 깨닫는다.
앞차가 속도를 내서 도망가는데 내가 급브레이크 밟을 때, 더욱 위험하다. 바로 뒤에 따라오는 차가 내 차를 들이받을 수 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늘 뒤에 차가 쫓아오는지 살펴봐야 한다. 교통법규를 지키기 위해 합법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았고, 뒤따라오던 차가 불법적으로 내 차를 들이받았다고 해도 그건 내가 다치지 않았을 때나 의미 있는 일이다.
바둑을 처음 배울 때 ‘정석’을 익히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정석이란 오랜 바둑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배 고수가 여러 단계의 학습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낸 바둑 두기의 법칙이다. 정석을 많이 익힐수록 바둑 실력이 부쩍 향상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정석을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앞길을 가로막는 벽을 만나게 된다. 이때 듣는 말이 바로 ‘정석을 잊어버려라’다.
초보는 이 말을 들으면 당황한다. ‘언제는 그토록 정석을 배우라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배웠더니 이젠 잊으라고 하냐’며 분노를 나타내기까지 한다. 이 분노를 이겨내고 정석을 잊어야 고수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여기서 ‘잊으라’는 말은 말 그대로 ‘기억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 지울 수 있겠는가. 잊으라는 것은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정석은 바둑 고수라면 누구나 달달 외운다. 하지만 정석만으로는 상대를 이기기에 벅차다. 바둑은 인생이라는 말처럼 바둑판 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런 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면서 마침내 상대를 이기려면 정석은 물론 그 이상의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포석과 세력, 즉 주변 돌과 관계다. 상대방 돌을 공격할 때는 내 돌이 강한 쪽으로 모는 게 올바른 전략이다.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경제도 마찬가지다. 특정 분야를 좁고 깊게 보는 미시경제학과 경제 전체를 넓게 관계망으로 보는 거시경제학이 균형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미시경제는 기업이 어떻게 신제품을 개발해 어떤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할지를 다룬다. 그런 기업 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재를 어떻게 뽑고 생산을 어떻게 관리하며 자금 조달과 판매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를 다루는 경영학도 미시경제 분야다.
각 가정에서 한 달에 번 돈으로 저축을 얼마 하고,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며, 내 집 마련과 노후생활 준비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초보자가 앞만 보고 운전하고 정석만 중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거시경제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본다. 개인과 가정으로 이루어진 것을 소비로 보고, 수십 수백만 개의 기업이 영위하는 활동을 생산으로 간주하고, 세금을 거둬 나라를 지키고 사회간접자본(SOC)을 만들며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복지제도를 운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전후좌우를 폭넓게 살피며 운전하고 주위 돌들과 관계를 고려해 공격과 수비를 적절히 운용하는 바둑과 닮았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도 비슷하다. 투자하려는 개별 주식과 부동산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미시다. 거시는 개별 종목의 호재와 악재는 물론 코로나19처럼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높여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소를 종합적으로 살핀다. 각 가정에서 이뤄지는 일상적인 경제활동도 미시와 거시로 나뉜다. 한 달에 버는 소득에서 소비와 저축·교육 등에 얼마씩 배정할지는 거시이며, 소비는 어떻게 하고 교육에서는 어떤 분야에 중점을 둘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시다.
미시에는 미시적 방향이 있고 거시에는 거시에 어울리는 접근 방식이 있다. 미시를 거시에 적용하면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나아가 뜻하지 않은 부작용도 생긴다. 미시로 할지 거시로 할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와 경제학 실력은 부쩍 는다.

 홍찬선_ <한국경제> <동아일보> <머니투데이>에서 28년간 기자를 지냈다. 저서로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임시정부 100년 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 역서에 <비즈니스 경제학> <철학이 있는 부자>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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