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왜 사재기가 일어나지 않을까?”
코로나19 감염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정기 모임을 미뤘던 벗들이 오랜만에 만나 던진 의문이었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던 미국·일본·호주 등지에서 일어난 사재기가 화제에 올랐다. 특히 식료품 사재기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화장지 사재기는 경제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선진국의 부끄러운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사재기, 왜 한국에선 일어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분석이었다. 한국에도 초기에 사재기 조짐이 있었다. 사재기 대상은 쌀과 라면, 생수와 통조림, 세제와 화장지 등이었다. 다만 한 번도 공급 부족이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 잔뜩 사놓지 않아도 필요할 때는 언제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걸로 사재기는 끝났다. 하지만 미국 등에서는 코로나19 초기에 느긋하다 갑자기 확산하면서 사재기를 부추겼다. 지금 못 사면 계속 살 수 없으리란 불안감이 퍼지며 평소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사려고 한다. 공급 물량은 더욱 모자라고 사재기 심리는 더 강화된다.
출퇴근 시간에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에 비집고 타느냐, 다음 열차를 기다리느냐도 마찬가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일부 은행에서 빚어진 예금인출 사태도 사재기와 비슷하다. 예금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남보다 먼저 돈을 찾자는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사재기는 시장 실패의 대표적 사례
‘마스크 대란’도 사재기에 따른 것이었다. 31번 확진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가 크게 확산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국내에서 생산한 마스크 대부분은 중국 등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대구·경북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수백 명씩 늘어나자 마스크 사재기가 일어났다. 급기야 정부가 나서 ‘마스크 5부제’를 시행했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제기됐으나 급한 불은 껐다.
사재기는 시장 실패의 대표적 사례다. 자본주의는 시장에 맡겨두면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균형을 맞춰 적정가격에 거래가 이뤄진다는 시장 기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재기는 이런 시장 기능을 마비시킨다. 왜 시장의 실패가 일어날까?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이성적 경제인이다 ▲시장은 완전경쟁이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ceteris paribus)는 세 가지 가정이 갖춰져야 한다. 사람은 이성을 갖고 있는 합리적 경제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은 감정에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마스크를 하나씩 사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머리(이성)로는 알지만, 가슴(감정)은 살 수 있을 때 많이 사두라고 유혹한다. 극장에서 불이 났을 때 줄 서서 차례대로 대피하면 모두 살 수 있지만, 뒤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나가겠다고 밀어 수많은 사람이 밟혀 죽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시장은 완전히 경쟁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수요자와 공급자가 매우 많지도 않고, 모든 정보가 공짜로 무제한 제공되지도 않으며, 마스크가 없을 때 이를 대체할 상품을 실시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스크가 부족할 때 생산을 늘리려면 원자재 확보 등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코로나19처럼 빠르게 전염되는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상황은 이미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무너뜨린다. 전염을 우려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이 시장이나 극장에 가기를 꺼린다. 진해 군항제와 여의도 벚꽃축제 등이 모두 취소됐다. 백화점과 병원이 폐쇄되고 삼성전자 인도공장도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지 않으니,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가 발생한다.
시장 실패 치유하는 게 정부의 역할
시장의 실패는 사재기로 끝나지 않는다.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실업과 성장 둔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국경을 폐쇄하는 나라가 늘어나면서 하늘길, 바닷길이 막혔다. 공항과 항공사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식당을 찾는 사람이 줄어드니 종업원 수도 줄어든다. 일용직 근로자와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급감한다. 주가가 급락하고 원화 가치도 크게 떨어진다. 시장이 급작스럽게 다가온 이런 위기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위기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이때 시장의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것이 정부다. 시장에 맡겨두면 장기적으로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게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대공황 당시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며 당장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시장 실패를 치유하기 위해선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소득하위 70% 가구에 100만 원씩(4인 가족 기준) 지급하기로 했다. 일부 지방정부도 재정 상황에 맞춰 재난기본소득을 준다. 코로나19로 경제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응급 처방이다. 한국은행은 3월 16일,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 금리를 연1.25%에서 0.75%로 0.5%포인트 인하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방식으로 금융시장에 자금을 대규모로 공급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증시 및 채권 안정기금을 크게 확대했다. 정부의 발 빠른 대응으로 급한 불은 끄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다.
홍찬선_ <한국경제> <동아일보> <머니투데이>에서 28년간 기자를 지냈다. 저서로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임시정부 100년 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 역서에 <비즈니스 경제학> <철학이 있는 부자>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