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으로 불러야지 3·1운동 아냐 독립운동가 자부심 잃지 않게 해주길”

2020.03.02 최신호 보기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청사에 걸린 백범 김구 사진 앞에 선 증손자 김용만 씨│김용만

백범 김구 선생 증손자 김용만 씨 인터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그의 증손자인 김용만(35) 씨는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사업’을 국민이 주도하자는 취지로 꾸려진 시민위원회 단장을 맡아 지난 3년간 이끌었다. 백범 선생의 차남인 김신(1922~2016) 장군의 둘째 아들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아버지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할아버지(2기)와 아버지(70기)를 이어 3대째 공군 학사장교(125기)로 복무했다. 3년간의 단장직을 내려 놓은 김 씨는 현재 회사와 역사 기리기 운동을 병행하며 사회에서 활동 중이다. 김 씨에게 시민위원회 활동과 101주년을 맞은 소회, 그리고 현재 3·1운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시민위원 310 단장’으로 2019년까지 3년간 활동했다. 어떤 마음으로 시민위원회에 합류했나.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나이도 경험도 부족하고, 증조부와 가족을 대표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두 차례나 거절했다. 사업 총괄을 맡은 서해성 감독과 대화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젊은 세대가 역사와 관련된 많은 부분을 아직 웃어른에게 의지하면서 소극적인 자세로 있다”는 따끔한 꾸중을 듣고 나서다. 책임을 회피하고 득과 실을 따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번이라도 더 어르신들의 역사적인 지식을 전달받아 내 것으로 만들며, 실수를 하더라도 더 능동적인 자세로 대한민국의 역사 흐름에 기여해보고자 동참했다.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고 활동했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정부 행사는 ‘반쪽 잔치’ 성격이 있었다. 그래서 100주년 행사는 그 주인공을 시민과 국민들로 만들고자 애썼다. 3·1운동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되었고 지금의 오늘과 우리가 존재한다. 당시 그 중심에는 정부 관료들이 아닌 220만이 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220만 명의 평범한 인파를 통해 봉건시대를 근대로, 왕토를 국토로, 백성을 시민으로 바꾼 말 그대로 민초들의 혁명이었다. 즉, 시민과 국민이 주체가 되어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사건을, 100주년에 다시 한번 재현을 해보고자 했다. ‘시민위원 310’도 이런 자발성을 가장 큰 성격으로 했다.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어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이했다.
 
시민위원회 단장 맡아 젊은 세대 참여 이끌어
-10대부터 70대까지 310명의 시민위원이 함께했다. 3년 동안 시민위원회는 어떤 활동을 했나.
=독립운동 기념시설 조성, 시민참여 행사 및 교육, 독립유공자 예우 강화. 총 3대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여 기념일에만 진행되는 일회성 행사보다는 실제 우리 후손들의 삶에까지 연결되는 결과물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조성, 안국역 항일독립운동 테마역사 조성, 100주년 기념 3·1운동 도로 조성, 남산 역사탐방로 조성, ‘대한민국 100년’ 뿌리알기 강좌 개설, 독립운동가 후손 시립대 등록금 면제 확대, 독립운동가 묘소 환경개선 지원 등 일상에서 접하고 느낄 수 있는 영구적이거나 적어도 일회성이 아닌 내용들을 집중해 만들었다.

-2019년 정부와 지차체들이 다양한 기념 사업을 진행했고, 특히 젊은 세대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 속에서 인식변화가 조금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현장에서 체감은 어떤가.
=예상 외로 젊은 세대의 참여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대한 인식변화가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100주년이라는 특별한 해를 맞이해 다양한 문화 콘텐츠(독립운동사 관련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와 국가적인 홍보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로 보여진다.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2017년 서울시에서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주로 대학가 인근) 깜짝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예상했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에 대한 의미나 임시정부 수립 배경 등에 대해 답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2년 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이로 인해 100주년을 겪은 세대는 그렇지 않았던 세대보다 분명 독립운동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100주년을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과 그 이후 세대들을 위해 100주년에서 보았던 우리의 노력들이 계속될 필요가 있는 이유다.

-2020년은 단장 자리를 내려 놓고 맞이하는 첫 3·1절이다. 101주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듯 싶다.
=3년 동안 단장직을 맡으며 내 자신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시작과 지금까지 겪어온 한 세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뒤에는 뿌듯함과 자긍심보다도 사실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좀 더 많다.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 한 언론에서 당시 광복회원 6830명 전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75.2%가 월소득 200만 원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계층을 어떻게 의식하느냐’는 질문에 64.1%가 ‘하(下)의 하’라고 대답했다. 과거 이런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나는 3·1절이 자랑스러운 날이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분들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함께 한다.
 
▶2018년 임정수립 기념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특별사진전에 참석한 김용만 씨│ 김용만

3·1운동 100년은 곧 대한민국 100년
-3·1운동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김 씨는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배경과 의미를 짚어달라.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시작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무단통치시기를 겪으며 1919년 3·1운동을 그 초석으로 삼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4월 11일 설립되어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지금 우리의 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한다. 그렇기에 3·1운동 100년은 곧 대한민국 100년인 것이다. 3·1운동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프랑스혁명이나 중국의 신해혁명과도 견줄만큼 거대한 사건이었다. 김삼웅 전 독림기념관장이 얘기한 대로, 7500명이 사망하고 1만 5000명이 부상을 입고 5만 명이 검거된,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성격과 근본을 송두리째 뒤바꾼 대사건이다. 이런 이유로 명칭부터 3·1운동이 아닌 3·1혁명으로 정명(正名)을 찾아야 한다. 또 원래 3·1혁명이라 불리던 것을 친일 세력으로 인해 그 가치가 깎여 3·1운동으로 바뀐 것이기에 더더욱 3·1혁명으로 불려야 한다.

-백범 선생의 증손자다. 또 할아버지는 공군참모총장을, 아버지는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어릴 적부터 강압적이든 혹은 자연스레 보훈의 가치에 대해 스며든 생각이 있을 듯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보훈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릴 적엔 증조부 관련된 일에 나를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증조부를 기리는 큰 행사를 다니며 자칫 잘못해 거만해지는 것과 내가 느낄 부담감을 덜해주려 했다고 나중에 아버지에게 들었다. 그래서인지, 부끄럽지만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공군 장교 복무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보훈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교로 임관하는 순간부터 백범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서울시 광복 70주년 준비위원, 시민위원 310 단장과 같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독립운동사, 근현대사, 그리고 역사 전반에 있어 보훈이라는 개념을 곁에 두고 사는 삶으로 변했다. 솔직히 귀국한지 1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어렵고 얼음장 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래도 이미 주어진 나의 삶이기에 역사 기리기 운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 중에 있다.
 
백범은 항상 국익을 가족보다 먼저 생각
-언제부터 백범 선생의 존재를 인식했나. 이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
=사실 아직까지도 증조부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때인데, 국사책에 증조부의 사진과 함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나왔다. 선생님은 종종 그 대목을 나에게 읽게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친구들과 놀다 사고를 치면 선생님은 항상 나를 더 혼내셨다. 당시엔 그냥 그분이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돌아보면 참 우스운 감정이었다.

-2019년 말 역사 탐사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증조부의 발자취를 따라 갔다. 그 전에도 다녀온 적이 있나. 현장에서는 뭘 느꼈나.
=과거 아버지가 중국 상하이 총영사로 근무하던 시절 짧게 다녀온 적이 있다. 100주년 해인 2019년 2월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팀과 함께 상하이, 가흥,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충칭까지 연결하여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12일 동안 처음으로 다녀왔다. 타국의 땅 위에 우리의 선열을 기리는 기념관과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뿌듯함에 가슴이 뜨거웠다. 반면, 임시정부의 최초 청사(상하이 서금2로)의 위치, 광복을 맞이했던 우리 선열들의 삶의 터전(충칭 토교촌)이 폐허처럼 방치된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럽기도 했다. 우리가 좇은 발자취 몇몇 장소에서 무궁화 조화를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런 비석이나 안내판 하나 없는 초라한 우리의 뿌리에 놓인 그 조화가 한 줄기 희망같이 느껴졌다. 아직 우리 선조들의 뜻과 마음을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마음들이 어딘가 남아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가족들이 기억하는 백범 선생은 어떤 분인가.
=국부로도 표현되며 따뜻한 아버지 상으로 많이들 기억하지만 항일운동 당시 가족들에게는 냉철한 분이었다. 항상 국익을 가족보다 우선시 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이따금 들려주곤 했는데, 편지로만 소통할 수 밖에 없던 시절 ‘아버지(백범)가 너무 보고 싶어 날아온 편지의 우표를 때어 아버지의 침 냄새를 맡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백범일지>는 증조부의 시점에서 작성된 것이기에 가족 입장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그리움은 잘 표현되어 있지 않다. 증조부는 고조모, 증조모, 그리고 조부에게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백범은 불가능한 줄 알지만, 그래도 하려했던 사람
-더 미래의 세대에게 증조부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을 때, 일본과 한국의 군사적, 경제적 차이는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조부는 임시정부를 통해 일본과 전쟁을 준비했다. 광복 이후 남북 분단 앞에서 남북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며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북 연석회의를 강행했다. 할아버지인 아버지는 이를 공자의 말을 빌려 ‘지기불가위이위지(知其不可爲而爲之)’라 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는 일. 나는 증조부를 그렇게 설명하고 싶다. 불가능한 줄 알지만, 그래도 하려고 했던 사람.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의미가 없거나 무모한 이상주의적 행위로 생각될 수 있지만, 나는 불가능해도 이루고자 하는 일에 도전하는 그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모습이 당장은 의미가 없거나 무모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우리들 마음 어딘가에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 국민으로부터 찾았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백범의 무모한 연석회의 강행을 끝까지 한반도를 하나로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알아주며 우리 국민은 그를 위해 헌화한다. 나는 우리가 그런 그의 마음을 흠모하고, 우리 삶 속에서도 가꿔가고 있기를 바란다.

-이것만은 꼭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시민위원 310 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반복적으로 외쳐왔다. 정부예산 부족, 지원대상 심의 등 여러 난점들로 경제적인 보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어렵다면,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라도 그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잃지 않게 해야한다. 100주년 때 일부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는데, 이후에도 나라를 위애 애쓴 분들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선생의 ‘나의 소원’ 글귀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글 심은하 기자
사진 제공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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