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러시아·몽골과 수교 30주년을 맞아 북방국가들과 경제협력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도록 정부가 신북방정책을 역점 추진한다. 2019년이 신남방 11개 나라 정상 순방, 한·아세안(ASEAN) 특별정상회의 국내 개최 등 ‘신남방정책’에 주력한 해였다면, 2020년은 러시아·중국 등 북방국가들과 협력 증진에 집중하는 ‘신북방 협력의 해’로 삼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1월 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북방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다양한 경제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내용을 담은 ‘2020년 대외경제정책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이날 홍 부총리는 “북방국가와 경제협력에 새 지평을 열 수 있도록 신북방정책을 역점적으로 추진하겠다”며 “2020년이 명실상부한 신북방정책 성과 창출의 원년이 되도록 북방국가와 경협을 강화하고 협력사업의 성과를 가시화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1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권구훈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에게 “올해 다시 찾아오기 힘든 좋은 계기를 맞은 만큼 신북방정책이 실질적 성과를 내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청와대에서 ‘2020년 신북방정책 전략’을 보고한 권 위원장은 “2019년 신남방정책의 계기(모멘텀)를 이어 올해를 ‘신북방 협력의 해’로 삼아 북방 경제협력의 실질적 성과를 창출하고 확산하는 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신북방정책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경제협력, 외교 행사, 문화·인적 교류, 홍보 등의 유기적인 추진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9월 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
러시아·몽골과 미래 30년 경협전략
30년 전인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유엔본부에서 외무장관 회담을 열고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서(코뮈니케)에 서명했다. 1905년 대한제국과 제정러시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85년 만이었다. 수교 이후 러시아 극동은 ‘한러 교류의 시금석’ 역할을 해왔다. 2018년 양국 교역의 40%가 극동에서 이뤄졌고, 극동 전체 교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한국은 극동의 제1위 수출국이자 제2위 수입국이다.
정부는 한러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러시아와 경제협력 체계 고도화에 나선다. 1월 20일 발표한 ‘2020년 대외경제정책 추진방향’에서 “러시아와 양자·다자간 FTA 벨트를 구축해 교역·투자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한러 서비스·투자 FTA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한·유라시아경제연합(EAEU) FTA도 추진한다. EAEU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등 5개 나라로 구성된 경제연합이다. 2020년 상반기에 열리는 제10차 한러 산업협력위원회와 양국 고위급 교류에서 구체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는 양국 경제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준비위원회를 설립, 경제·문화·예술 등 270여 개 행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미 2020년과 2021년을 ‘한러 상호 문화교류의 해’로 지정하고, 상호 이해 제고와 문화교류 확대를 목표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러 경제협력의 핵심 ‘9개 다리’
한반도와 인접한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남북러 3각 협력 방안도 추진한다. 정부는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와 러시아 직접투자펀드(RDIF)의 디벨로퍼 협의체를 구축해 한국과 북한, 러시아를 잇는 철도·도로 등 교통 인프라와 플랜트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대북·대러 제재를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수익성 있는 개발사업을 발굴해 수출금융 등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인프라 분야에서 남북러 3각 협력을 통해 앞으로 러시아와 교역 규모는 1000억 달러까지 늘리기로 했다. 정부는 현재 300억 달러 수준인 러시아와 교역 규모를 한러 경협을 통해 500억 달러로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러 3각 협력까지 성사되면 교역 규모는 1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다.
‘2020년 대외경제정책 추진방향’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한러 협력의 핵심인 ‘9개 다리(9-브리지) 행동계획’에 금융·문화·혁신 등 유망 분야를 새롭게 추가해 ‘9개 다리 행동계획 2.0’으로 확대·개편한다는 내용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주요 경제 분야별 협력계획을 담은 ‘9개 다리 행동계획’은 2017년 9월 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밝혔다. “러시아와 한국 사이에 가스, 철도, 항만, 전력, 북극항로, 조선, 산업단지, 농업, 수산 분야 등 9개의 다리를 놓아 동시다발적인 협력을 이뤄나가자”고 말했다. 유라시아의 풍부한 에너지, 농수산 자원과 인구를 한국의 자본, 기술력과 결합해 양국 모두 이익을 얻는 사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나아가 한국과 러시아, 중국, 몽골 등 북방국가의 에너지·전력·교통·물류 네트워크를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북방 경제권을 형성하자는 비전을 담았다.
12개 분야 북방경제 활성화 전략
2018년 6월 22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문 대통령은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9개 다리 행동계획’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9개 산업 분야에서 협력·발전을 위해 양국 관계부처와 민간기업, 유관기관 간 협력 수준을 높이기로 했다.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언론발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 두 정상은 철도, 전력, 가스, 조선, 항만 등 9개 분야 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9개 다리 행동계획이 이른 시일 안에 채택되어 협력이 가속화하기를 기대한다”며 “남북러 3각 협력사업을 대비해 한러 양국이 우선 할 수 있는 사업을 착실히 추진하기로 했다. 철도, 전력망, 가스관 연결에 대한 공동연구가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나진-하산 철도 공동활용 사업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 공동연구 △한국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확대 촉진 △화석연료 매장지 공동개발 가능성 검토 △파이프라인 천연가스(PNG) 공급 공동연구 △동북아 전력망 연계 등에 나서기로 했다.
이후 한국의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와 러시아 경제개발부를 중심으로 양국 관계부처가 9개 분야의 협력계획을 논의했고, 2019년 2월 13일 한국과 러시아는 ‘9개 다리 행동계획’에 서명했다. 이 행동계획에는 9개 다리 및 교육·보건의료·환경까지 모두 12개 분야에서 북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전략의 구체적 이행계획을 담았다. 아울러 양국 실무그룹을 구성, 행동계획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신규 사업을 발굴토록 규정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철도·가스·전력 등 북방 경제협력을 대비하는 남북러 공동연구를 추진하는 안도 계획에 포함됐다. 글레프 이바셴초프 전 주한 러시아 대사는 “‘9개 다리 행동계획’은 아주 유망한 프로젝트”라며 “이 프로젝트 이행은 양국 통상·경제 관계를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평가했다.
‘행동계획 2.0’으로 경제협력 고도화
9개의 다리는 러시아 극동의 지역적 특성에 부합하는 경제협력 과제에 집중되어 있다. 몰도바, 몽골,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조지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북방지역 전체의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산업 분야를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4차 산업혁명 관련 과학기술과 문화 등의 분야는 9개 다리에 포함되지 않지만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북방지역 나라들과 협력하고 있는 주요 의제다.
2019년 12월 5일 서울에서 열린 9개 다리 행동계획 분야별 워킹그룹 회의에서 한국과 러시아는 2020년 초까지 ‘9개 다리 행동계획’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티무르 막시모프 러시아 경제개발부 차관과 면담한 권구훈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은 “한러 경제협력의 전략이자 브랜드라 할 수 있는 ‘9개 다리 행동계획’을 통해 실질적 경제협력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며 “2020년 초까지 ‘9개 다리 행동계획 2.0’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막시모프 차관은 ‘9개 다리 행동계획 2.0’을 마련하자는 제안에 동의하며 “이번 회의에서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성과를 창출하겠다는 양국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9개 다리 협력 분야에서 양국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9개 다리’ 모델 중앙아시아 국가에도 적용
‘9개 다리 행동계획 2.0’에는 금융·문화·혁신 등 질적 성과를 신속하게 거둘 수 있는 분야가 대거 포함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금융 분야는 양국이 소재·부품·장비 공동 투자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일차적으로 4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만들고 앞으로 10억 달러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2018년 정상회담 이후 양국이 가동한 공동 혁신 플랫폼에서 이뤄지고 있는 기술협력을 포함하자는 제안도 새롭게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양국 정상은 한국의 첨단 산업기술과 러시아의 기초과학을 결합한 공동 혁신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정부는 혁신·에너지·보건의료 등 분야의 협력을 확대해 우리 기업의 현지 진출도 지원할 방침이다. 권 위원장은 “새롭게 마련될 ‘9개 다리 행동계획 2.0’이 양국의 경제협력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함께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러시아와 구축한 ‘9개 다리’ 경제협력 모델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도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중앙아시아에 중장기 협력 비전과 협력 모델을 도입하고, 인프라·산업·문화·보건 분야의 산업협력도 확대한다. 또 고위급 채널을 활용해 해당 국가의 인프라 수주 지원도 강화한다. 몽골과 기타 독립국가연합(CIS) 나라들과는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KSP)과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연계해 한국형 경제개발 경험을 공유할 방침이다.
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