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혐오표현과 미디어 리터러시
“10명 중 8명 혐오표현 경험했다” 응답
‘○○녀 주제에….’
30대 직장인 최 모 씨는 얼마 전, 연말 시상식에 드레스를 입고 나온 배우의 사진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놀랐다. “‘??녀 주제에’를 비롯해 외모나 성적 비하가 담긴 댓글이 줄줄이 달렸더라고요.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서 인터넷 창을 닫아버렸습니다.”
최 씨의 경험이 특별한 건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인터넷상에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공동체)나 기사 댓글에서 이런 혐오표현을 접하는 건 매우 일반적인 일이 됐다. 2018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혐오표현 대응 관련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온오프라인상에서 혐오표현을 경험했다’는 비율이 83.8%나 됐다. 10명 가운데 8명이 응답한 셈이다. 이 가운데서도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접했다는 응답은 77.9%로 오프라인(71.1%)보다 높았다. 혐오표현의 심각성 여부를 묻자 약 54%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답했다.
‘영혼의 살인’으로 불리는 사회문제
‘혐오표현’이란 뭘까.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수행 기관: 숙명여대 산학협력단)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개인·집단에 대해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혐오하거나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말한다. 한국에서 혐오표현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이후 온라인 댓글과 커뮤니티 문화 등이 활성화되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 한마디가 칼이 되는 경우는 많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에 따르면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의 속성을 이유로 대상자를 열등하다거나 불결한, 또는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차별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이들을 배제하려 한다. 따라서 대상자는 위축감이나 공포감, 정서적 스트레스를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하하거나 부정하는 심리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 전문가들이 혐오표현을 ‘영혼의 살인’이라 부르는 이유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9년 ‘혐오차별 국민 인식 조사’(이하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1.8%에 해당하는 이들이 혐오표현이 향후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혐오표현이 자연적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은 22.2%였다. 우리 사회가 혐오표현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하는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 ‘혐오표현 추방 캠페인’ 동영상 갈무리
온라인 뉴스나 카페·커뮤니티서 주로 접해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접했어요.”
“유튜버가 말하는 걸 듣고 알았어요.”
2018년 여성가족부가 제작한 ‘혐오표현을 멈춰주세요’ 캠페인 영상에 출연한 학생들에게 ‘혐오표현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질문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이들은 “‘김치녀’ ‘한남’ ‘느금마’ ‘느개비’ 등의 혐오표현을 접한 적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채널에서 혐오표현을 접한다. 문체부의 ‘혐오표현 대응 관련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혐오표현을 접한 경로로 온라인의 경우 온라인 뉴스 기사(49.8%), 온라인 카페·커뮤니티(21.6%), 누리소통망(SNS, 15.1%) 순으로, 오프라인은 대중매체(49.8%), 공공장소(22.8%), 학교·직장(14.7%)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최근에는 특히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혐오표현을 접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혐오표현과 관련한 구체적인 법이 없고 모욕죄, 명예훼손죄, 정보통신망법 정도로 대응하는 수준이다. 혐오표현을 법으로 규율하는 국가로는 캐나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덴마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브라질, 싱가포르, 일본, 뉴질랜드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혐오표현을 법으로 규제해야 할 필요성을 놓고 사회적으로 찬반 의견이 나뉜다. 개인의 존엄성 침해, 소수자에 대한 해악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국가에 의한 표현의 자유 억압, 검열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규제할 경우 혐오표현의 개념과 범위 등을 명확히 규정해야 하고, 혐오표현에 노출됐을 때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등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논의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 ‘혐오표현 추방 캠페인’ 동영상 갈무리
미디어 이용자 ‘비판적 이해 능력’ 중요해져
혐오표현과 관련해 법 제정으로 처벌을 제도화하는 논의보다 인권 교육과 체계적인 미디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2019년 문체부의 ‘인터넷상의 혐오표현과 디지털 리터러시 연구’(수행 기관: 한림대 산학협력단)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대학생들은 인터넷 혐오표현 예방을 위한 대응 방안으로 ‘법 제정을 통한 강력한 처벌의 제도화’와 ‘인터넷 플랫폼의 자율 규제’, ‘인권 교육과 미디어 교육의 체계적인 실시’ 등을 제시했다. 특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권 교육과 미디어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 논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미디어 채널에서 혐오표현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미디어 교육을 단순히 ‘미디어를 기술적으로 잘 활용하는 능력을 교육하는 것’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디어 교육과 미디어 교육 정책 등을 연구해온 세계적인 학자 데이비드 버킹엄은 <미디어 교육 선언>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미디어 교육은 기술적 능력만 개발하는 것도 아니며,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미디어 교육은 이용자의 비판적 이해 능력을 함양하는 것과 관련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적 소통’ ‘책임과 권리’… 미디어 리터러시 필요
김경희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는 “혐오표현 등 디지털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소통 문제를 해결하려면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혐오표현 등이 논란이 되면서 민주시민 교육의 중요성도 높아졌다. 그런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상황에서, 미디어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교육과정이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희 교수는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이용 능력을 뜻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라 생각한다”며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의 구성 요소를 ‘접근과 통제, 비판적 이해, 사회적 소통, 책임과 권리’ 크게 네 가지로 나눴다. 그는 “미디어를 선택하는 데 필요한 콘텐츠는 취하고 불필요한 콘텐츠는 차단하는 등의 능력,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 이용 능력을 ‘접근과 통제’라고 한다면, 콘텐츠의 구분 및 정보 분석과 평가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비판적 이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처럼 미디어 채널 안에서 혐오표현이 많이 쓰일 때는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요소 중에서도 ‘사회적 소통’과 ‘책임과 권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사회적 소통이란 사회적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공론화 과정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적 실천 능력을 뜻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사회 구성원들이 미디어를 이용하며 명예훼손, 사생활 침해 등을 하지 않으면서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혐오표현 등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며 책임과 권리에 대해 강조했다.
‘혐오표현 반대 미디어 실천 선언’도 나와
한편 ‘국민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49.1%는 언론이 혐오표현을 조장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혐오표현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가운데 ‘언론의 혐오를 조장하는 보도 자제’(87.2%)를 1위로 꼽았다. 미디어가 편견을 조장하고 혐오표현을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에서 미디어 콘텐츠 생산자들이 혐오표현 근절에 앞장서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월 16일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한국아나운서연합회, 한국방송작가협회, 인플루언서경제산업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9개 미디어 단체와 공동으로 ‘혐오표현 반대 미디어 실천 선언’을 마련했다. 혐오표현의 기본적인 개념과 맥락, 미디어 종사자들이 지켜야 할 실천 사항을 정리한 선언문에는 혐오표현 확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와 어떤 혐오표현도 반대한다는 원칙에 따라 ▲혐오표현 개념과 해악 등 인식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 적극 대응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의 혐오표현에 대한 엄격한 시각 ▲왜곡된 정보 팩트체크를 통한 비판적 전달 ▲역사 부정 발언 지적 등 혐오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미디어 종사자들의 실천 사항이 담겨 있다.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