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쇠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캔버스에 유채, 207.5×308cm, 1884~1886.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20세기 최고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평생 2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작(多作)이다. 10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내 26세에 입체주의의 상징적 그림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로 유럽 화단을 평정한 뒤 아흔 넘어 죽을 때까지 유명세를 탄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독보적인 재능으로 70년 가까이 세계 미술계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피카소와 달리 젊은 나이에 아깝게 요절한 천재 화가도 여럿 있다. 최초의 원근법 회화인 ‘성 삼위일체’(1427)를 제작한 마사초(1401~1428)가 27세에, 에로틱한 그림을 예술적 영역으로 끌어 올린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1890~1918)가 28세에,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반 고흐(1853~1890)와 르네상스 3대 거장의 하나인 라파엘로(1483~1520)는 37세에, 우수 어린 반(反)비례 슬픈 인물화로 잘 알려진 모딜리아니(1884~1920)는 36세에 생을 마감했다. 또 한 명의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도 위대한 요절화가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붓질 대신 일일이 점을 찍어 색채와 형태를 표현한 점묘법의 창시자인 쇠라는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에 사망했다.
점묘회화의 상징이자 얼굴
고흐와 동시대에 활동한 쇠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각고의 정성과 끈질긴 인내심이 불가피한 점묘법의 특성상 스케치와 드로잉을 제외한 순수 유화 작품은 7점밖에 남기지 못했다. 1점의 유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수년이나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치는 그의 꼼꼼한 성격도 원인이 됐을 것이다. 본격적인 화가로 생활한 기간이 10년 남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작(寡作) 중의 과작이 아닐 수 없다.
몇 안 되는 쇠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바로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인데, 점묘회화의 상징이자 얼굴이다. 쇠라가 25세 때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완성하기까지 2년이 걸린 데다 세로가 2m 넘고 가로는 3m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일체의 붓질 없이 캔버스에 하나하나 작은 점만 찍어 이만한 크기의 그림을 제작했다니 그 공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1859년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쇠라는 안정적인 가정환경과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밴 공무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차분하고 모범적인 성장과정을 보냈으며 반듯하고 학구적인 성격은 평생 그를 지배했다. 드넓은 캔버스 공간에 과학적인 광학 이론에 따라 일일이 색 점을 찍는 고된 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살인적 노동 강도를 견뎌낸 것도 아마 그의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점묘회화를 최초로 세상에 선보인 쇠라가 유명한 이유는 물감을 섞지 않고 서로 다른 색 점을 병치해 본래의 색과는 다르게 보이는 보색효과를 구사했다는 데 있다. 즉 광학 이론이라는 과학 지식을 그림에 적용한 것이다. 팔레트나 캔버스에서 물감을 섞으면 색이 탁해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색이 섞이지 않게끔 색 점을 분할해서 나열하듯 찍는 분할 기법을 사용해 보는 이의 눈에서 색이 혼합되도록 하는 색채 광선주의 기법을 개발했다. 이로써 즉흥적이고 찰나의 붓질로 인해 조형적 질서가 어수선한 인상주의 그림의 약점을 극복하고 빛과 색채에 매달린 인상주의의 영역을 더욱 발전시켰다. 쇠라의 화풍이 신인상주의로 불리는 이유다.
과학 이론을 미술에 적용한 최초의 그림
붓 터치가 아닌 작은 색 점들을 찍어 완성한 그림인 점묘화의 창시자 쇠라의 대표작이자, 과학 이론을 미술에 적용한 최초의 그림으로 평가된다. 그랑자트섬은 파리 센강 근교의 접시 모양 섬으로 파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다. 이 그림은 화창한 휴일 오후, 그랑자트섬을 찾아 한가롭고 평화롭게 휴식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산책 중인 모녀, 데이트하는 연인, 풀밭에 비스듬히 누워 강 너머 풍경을 감상 중인 중년의 남자뿐 아니라 사람들 틈에 섞여 유유자적의 정취를 만끽하는 강아지와 원숭이도 보인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소장 중인 이 작품에는 일체의 선이 없고 작은 색 점만 가득하다. 세로 207.5cm, 가로 308cm 크기의 초대형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이 그림을 위해 쇠라는 2년(1884~1886) 동안 매일 그랑자트섬에 나가 수십 점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공력을 쏟아부었다. 오로지 점으로만 이뤄졌지만 형태 묘사가 분명하고 강렬한 햇살이 그림 전반을 지배해 빛이 자아내는 순간적인 인상 포착에 생명을 건 인상주의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시킨 작품이다. 특히 쇠라는 종전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빛의 순간적인 인상 포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빛에 생명을 불어넣어 표현하려는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는 한편, 그림 속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정지된 듯한 효과를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가까이서 그림을 보면 서로 다른 색 점이 나열된 단순한 점들의 집합체처럼 눈에 들어오지만 거리를 두고 감상하면 밝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확연히 드러나고, 형태의 질감은 물론 공고성까지 확보된다. 이는 색을 혼합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색 점들을 병치해 찍은 결과 보색효과를 이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그림을 보는 우리 눈이 시신경과 뇌의 신호에 따라 자동으로 색을 혼합하는 색채 광선주의 효과 때문이다.
색 점들의 크기와 점 사이의 간격도 그냥 정해진 게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봤을 때 인물과 사물, 강물, 나무, 풀밭 등 그림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의 조형적 질서 구축을 염두에 두고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계산된 결과다. 이 그림이 화소(畵素) 기능이 우수한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