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리니 감독이 끌고, 김연경이 받치고, 동료들이 밀고….
스테파노 라바리니(41·이탈리아)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1월 태국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1위를 차지해 3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확보한 것은 ‘원팀의 힘’이 배경이다.
주포인 김연경(터키 엑자시바시)은 복근이 파열하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태국과 결승전에서 20득점 이상을 해냈고, 왼쪽 무릎이 좋지 않은 이재영(흥국생명)은 공격을 주도했다. 라이트 김희진(IBK기업은행)은 대회 뒤 종아리 통증으로 4주 진단을 받았고, 주전 세터 이다영(현대건설)도 양쪽 발목에 무리가 왔다. 소속팀에 복귀해 제대로 경기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투혼을 발휘했으니, 올림픽 본선행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선수들의 열정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선수들 하나로 응집시킨 라바리니 감독
힘보다는 두뇌 플레이를 강조하는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들을 응집시킨 촉매제다. 이탈리아에서도 클럽을 이끌고 있는 그는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을 늘 소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시간을 배분하며 양쪽에서 사령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2019년 1월 부임 때 공언한 “한국의 올림픽 본선 진출” 약속을 지켰다. 외국인 지도자여서 국내 선수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 애초에 제기됐으나 문제는 없다. 김연경은 “라바리니 감독은 정말 최고다. 감독님 덕에 대표팀 경기력이 상승했다”고 말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토털배구를 추구한다. 스피드를 앞세운 그는 중앙 후위 공격 등을 추가하면서 한국팀의 득점로를 다양화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한국 배구가 정말 빨라졌다. 특히 블로킹 능력이 좋아졌다. 공격은 더 강해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번 올림픽 아시아대륙예선 결승전에서 태국에 완승을 거둔 것은 상징적이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이후 처음으로 태국을 3-0으로 이겼다. 6년 동안 태국과 맞전적에서 3승 7패로 밀리다 이번에 설욕을 한 것이다. 태국의 베테랑 세터 눗사라 ?캄의 볼 배급을 막기 위해 강력한 서브를 꽂았고, 적극적인 블로킹으로 승리의 길을 열었다.
김연경 의존 줄이고 동료들 활용 늘리고
김연경 한 명에 의존하던 불균형도 해소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대회 기간 부상을 당한 김연경을 적절하게 쉬도록 했고, 다른 선수들이 공백을 메우면서 공격의 활력을 높였다. 사실 김연경이 갖는 대표팀 내 무게감은 압도적이다. 감독도 선수를 다룰 때 세심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더라도 혼자서 배구를 할 수는 없다. 라바리니 감독은 김연경의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서 전체 선수들을 유연하게 활용해 출력을 높였다. 감독과 선수 상호 간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연경은 “2016년에도 복근을 다친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심각했다. 다친 직후 감독님과 트레이닝 코치님들이 모두 경기 출전을 말렸다. 만약 감독님이 출전을 강요했다면 거부감이 들었을 텐데, 저를 아껴주시는 모습을 보여줘 고마웠다”고 설명했다.
상대 전력을 분석해 맞춤 전술로 대응하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라바리니 감독은 “태국은 스피드를 갖춘 좋은 팀이다. 그런 팀을 무너뜨리려면 일단 서브가 강해야 한다. 한국은 높이에서 태국에 앞서니까 이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또 “선수들이 결승전에서 압박감을 느꼈다. 정신력을 강조했고, 이를 잘 이해한 선수들 덕에 우리가 우승했다”고 덧붙였다.
7월 도쿄올림픽에서 44년 만의 메달 노려
김연경의 마지막 출전이 될지 모르는 7월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44년 만의 여자배구 입상을 노린다. 본선 진출 국가는 모두 12개 팀. 세계 9위인 한국과 일본(7위), 세르비아(3위), 브라질(4위), 도미니카공화국(10위), 케냐(19위), 중국(1위), 미국(2위), 러시아(5위), 이탈리아(8위), 아르헨티나(11위), 터키(12위)가 나온다. 이들이 6개 팀씩 A~B조로 편성되고, 각조 상위 4개 팀이 8강에 진출한다.
물론 올림픽에서는 객관적 전력 외에 당일 몸 상태 등 변수가 크게 작용한다. 메달은 하늘이 점지해준다는 말도 있다. 분석에 능한 라바리니 감독의 임기응변과 ‘김연경과 황금세대’로 불리는 선수들은 일을 낼 각오다. 2012년 런던올림픽부터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는 김연경은 “지금 무리하면 올림픽 무대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올림픽에 초점을 맞추고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몸상태를 끌어올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내 프로배구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이 4월 초에 마무리되면, 5월부터는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가 열린다. 6월에는 브라질, 네덜란드, 터키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VNL 5주 차 경기를 치른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정예 멤버가 조직력을 다질 수 있는 기회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2012년 런던올림픽 4위, 2016년 리우올림픽 8강에 올랐다. 이번엔 8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대표팀 수장인 라바리니 감독은 “더 빠르고 공격적인 배구로 올림픽 본선을 치르겠다”고 구상을 밝혔다. 라바리니 감독이 도쿄에서 ‘마법’의 신바람을 불러낼지 팬들의 시선이 쏠린다.
김창금_ <한겨레>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