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대표(오른쪽)와 금태경 이사가 서울 서교동 ‘웃어밥’ 사무실 앞에서 인터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웃어밥’ 최성호대표·금태경 이사
“달동네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새벽마다 주먹밥을 만들어 1000원에 내다 팔았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그곳에서 드라마 <서울의 달> 이야기가 우리와 같다며 웃곤 했다.”
최성호(35)·최종은(35)·금태경(33) 세 청년은 2011년 11월 창업을 결심하고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6개월가량 아르바이트로 요식업을 경험하고 주먹밥 노점을 시작한 지 불과 4개월 만인 2012년 9월, 어엿한 매장을 열었다. 이후 매장을 늘리고 가맹 사업을 거쳐 2015년부터 네이버 라인, 롯데면세점, 경동나비엔 등 대기업 조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만든’ 주먹밥을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는 최성호 대표와 금태경 이사를 만나 ‘웃어밥’의 탄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상경 당시 20대 중·후반이던 세 청년은 지인에게 빌린 보증금으로 마포구 염리동 재개발 지역의 허름한 집에 짐을 풀었다. 최 대표는 “지방대 출신인 우리가 복지와 급여 좋고, 미래가 보장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이자 군대도 함께 간 친구(최종은)가 창업을 제안했고, 대학 후배인 금태경도 합류했다”고 말했다. 6개월 동안 각자 아르바이트하며 창업을 구상해오던 중 ‘당장 김밥이라도 팔아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재료 준비부터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아 보였다.
반면 주먹밥은 특별한 기술 없이도 잘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돈가스집, 카페 등 수십 년간 요식업을 해온 최 대표 부모에게 자문했다. 여기에 세 사람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웃어밥’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주먹밥을 먹는 사람들이 더 많이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수십 년 요식업 한 부모님께 자문
세 사람은 2012년 5월 이화여자대학교 지하철역 주변 노점에서 1000원짜리 주먹밥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아침 일찍 나가보니 등교하는 학생, 출근길 시민 등 모두 힘들어 보였다. 그들에게 힘찬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한 인사는 ‘더운 날, 시원한 우유 한 잔씩 드시고 힘내세요’ ‘오늘은 투표하는 날입니다. 소중한 한 표 꼭 행사하세요’ ‘임산부의 날이니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처럼 그날의 날씨·기념일 등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됐다. 최 대표는 “전날 뉴스를 보며 내일 이슈가 뭔지 살펴서 아침 인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아침 인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려 7년 넘게 이어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한 때는 방한 부츠까지 동원했지만 손발 끝이 다 얼어 동상에 걸릴 정도였다. 힘든 와중에도 ‘주먹밥 판매를 위한 호객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반드시 지켰다. 금 이사는 “공공의 선을 베풀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진심이 통했던 걸까. 이대 게시판에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지하철역 앞에서 에너지 넘치는 인사를 받았는데 힘이 난다’는 내용으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금 이사는 “이런 반응이 나오니 되레 저희가 힘을 얻게 되더라. 그런 의미에서 아침 인사는 웃어밥을 8년 동안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뜨거운 반응은 매출로도 이어졌다. 한 개에 1000원이던 주먹밥은 물량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4개월 만에 어엿한 매장도 열었다.
단순히 아침 인사로 얻은 반짝인기는 아니었다. 단돈 1000원짜리 주먹밥이지만 좋은 재료와 끊임없는 메뉴 개발이 가져온 결과였다. 최 대표는 “가격이 저렴하다고 질 낮은 재료로 대충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웃어밥을 통해 농부와 판매자, 소비자까지 ‘모두 웃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원칙이었다. 좋은 재료를 공급하는 농부에게 낮은 가격을 요구하면 농부는 웃지 못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윤을 덜 남기고 조금 더 노력하면 다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요구로 이대 안 매점 전체(12곳)에 주먹밥을 납품하게 됐다. 금 이사는 “납품 물량을 맞추기 위해 하루에 1000개씩 만들어야 했다. 조그만 규모의 매장에서 밥솥 50개를 동시에 돌려야 했는데, 그 열기가 장난 아니었다. 더위와 싸워가며 모두 힘들게 작업했다. 그런데도 늘 행복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웃어밥’이라는 이름처럼 웃는 일만 가득했다. 학생들의 응원이 아니면 일어나지 못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두세 개 정해 최대한 빨리 간접경험”
그야말로 이대의 명물이 된 웃어밥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장사를 하면서 세 사람이 몸소 터득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최 대표는 “그동안 프랜차이즈와 식품 제조업 등 여러 시도를 해왔는데, 지금은 주먹밥은 물론 샐러드, 컵과일, 빵 등 다양한 식단으로 구성해 여러 대기업에 조식 정기 배송을 하고 있다. 향후 냉동 주먹밥과 가정식 대체식품(HMR·Home Meal Replacement)으로 판로를 확장하기 위한 고민도 한다. 이 시장을 다 차지할 수는 없지만, 주먹밥만큼은 만족도 1위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먹밥을 팔기 시작한 지 어느덧 8년. 웃어밥은 얼마 전 이대를 떠나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금 이사는 “웃어밥의 힘의 원천인 아침 인사를 못 하게 돼 무척 아쉽다. 환경이 바뀐 만큼 아침 인사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웃어밥만의 브랜딩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웃어밥 직원뿐 아니라, 주먹밥 재료인 쌀 생산 농부부터 각종 거래처 직원 등 관련된 모든 사람이 노력한 만큼 업계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이들을 ‘성공한 청년’ ‘대박 난 청년’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최 대표는 우연한 성공과 대박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취업 생각만 있었지 꿈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관심 있는 분야 2~3개를 정해놓고 최대한 빨리 그와 관련된 간접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버티면서 파보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이 쌓여 지금의 웃어밥이 탄생했다.”
글 강민진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