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때도 학교에 남아 맹연습 중인 피아니스트 김초하 씨
발달장애 피아니스트 김초하씨
“전 느린 아이입니다. 천천히 가는 아이입니다. 이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아이입니다.”
‘남다름’을 당당하게 말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22세의 김초하 씨다.
그는 장애인이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이상 소견이 보였고 결국 선천성 구개파열로 태어났다. 발음도 부정확하고 비염도 극심해 수술 후 언어치료도 계속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는데, 커가면서 심장장애와 발달장애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2005년에 심장장애 3급 판정을, 2017년에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배우는 것도 또래보다 많이 느렸어요. 자신감이 없던 아이에게 음악은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었지요.” 22년 동안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켜온 어머니 이현주 씨의 말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피아노’와 ‘음악’이었어요”라고 말했다.
김초하 씨가 피아노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우연히 나간 콩쿠르에서 같은 음악학원 아이들 가운데 가장 좋은 상을 받았어요. 그 뒤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어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악보를 익히고 외워서 피아노를 치고 또 쳤어요.”
▶아부다비 페스티벌에서 피아노 독주
국제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 개막 공연
이렇게 우연히 다가온 피아노는 김 씨가 세상에 당당히 나설 문이자 통로가 되어주었다. 장애 학생 음악연주회 <뽀꼬 아 뽀꼬(poco a poco)> 독주와 앙상블 연주, 강원도교육청의 강원예술영재 선정, 평창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 독주, 강원예술고등학교 최초이자 유일한 장애 학생 입학생이며 졸업생이 되었고, 연세대 피아노과에 진학까지 했다. 큰 무대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2018년에는 대한민국 장애인 예술경연대회 <스페셜K> 결선 어워즈에 진출했고, 2019년 3월에는 성악가 조수미 씨와 함께 아부다비 페스티벌에서 스페셜올림픽코리아 앙상블의 피아노 독주와 연주를 펼쳤다. 7월에 막을 내린 전 세계 유일의 발달장애 아티스트 축제인 <2019 국제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에서는 피아노 독주를 했고, 연말에는 ‘스페셜 나이트’ 무대에서 한예종 김대진 교수와 피아노 듀엣을 가졌다. 또 2019년부터 지적장애가 있는 6명이 제이아트 앙상블로 뭉쳐서 활동도 하고 있다.
발달장애 예술인들의 소통의 현장을 목격한 어머니는 덧붙인다. “말로 서로 주고받지 않아도, 음악으로는 소통을 해요. 한 아이가 연주를 하면 다른 친구들도 각자의 악기로 연주하더라고요.”
김 씨는 피아노 앞에서 엄청난 집중력과 힘을 발휘한다.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는 고된 연습과 끈질긴 자신과 사투를 이겨내야 했지만 그는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몸집이 왜소한 김 씨에게는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다. 하나는 때리듯이 건반을 치는 버릇이다. 작은 몸으로 큰 소리를 내려는 욕심에서 비롯했다. 또 하나는 작은 손이다. 손이 작아 옥타브 위주로 된 곡의 연주가 쉽지 않았다. 최대한 건반 가까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습과 어깨 힘을 빼고 치는 연습, 테크닉을 키우는 스케일 연습 등을 거듭하며 고쳐나갔다.
이럴 때 흔히 쓰는 ‘극복’이라는 표현을 김 씨는 거부한다. “극복이란 단어를 정말 싫어해요. 전 극복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노력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고된 연습에도 피아노가 뭐 그리 좋을까.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작은 산골 교회에서 목회 일을 하는 김 씨 부모님은 강원예고 입학을 반대했다고 한다. “장애 특례입학생이란 편견과도 싸워야 하고, 기숙사 생활도 해야 했어요.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부모가 어쩌겠어요. 문을 두드려줘야죠.”
▶지적장애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제이아트 ‘앙상블’ 활동 등 피아니스트 김초하 씨는 2019년을 무척 바쁘게 보냈다.│김초하
“이제 내 속도 알고 주위 돌아볼 수 있어”
그는 피아노에 대한 꿈이 너무나 명확했다. “물론 연습은 힘들어요. 하지만 연주하고 나면 성취감이 굉장해요. 피아노는 저에게 희망이에요. 피아노가 없으면 제 삶도 없어요.”
스스로를 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소녀는 서서히 강해졌다. “2018년 여름에 오스트리아로 음악 캠프를 갔어요. 첫 해외 원정인데 2주간의 레슨은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혼자 트램과 지하철을 타고 구석구석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이번 겨울방학에도 학교 기숙사에 남아 있어요. 연습에 매진하려고요. 국제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에서는 참여한 해외 친구에게 제가 먼저 말을 걸어 친구가 됐어요.” 해외도, 대학도, 기숙사도, 타인도 낯설고 물설지만 김 씨는 먼저 다가갔다.
기숙사 생활이 힘들지 않은지 물으니 “엄마 잔소리 안 들어서 좋아요”라며 웃으며 답한다. 요즘 슈만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하기 힘들 만큼 행복하다고도 덧붙인다. “아라베스크는 슬픈 감정으로 쳐야 하거든요.”
김 씨는 포기하지 않는 긍정 에너지를 지녔다. 여기에 강원도 산골의 따스한 햇살도 품었다. 20대 김 씨의 인생 2막이 환하게 밝아온다. “새해엔 4학년이 되는데 졸업하고 대학원을 갈 생각이에요. 교육자가 되어 배운 것들을 나누고, 받았던 도움을 베풀고 싶어요.”
그는 미래의 모습에 대해 “이제 내 속도를 알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음악으로 위로하며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무대에서 연주할 때만은 전혀 떨리지 않는다는 피아니스트 김 씨가 오선지에 그려나갈 날들이 궁금해진다.
글 심은하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