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난 사이지만, 내일을 꿈꾸는 청년들은 금세 통했다. 왼쪽부터 김초하 피아니스트, 최성호 대표, 김민호 대표, 한재환 작가, 금태경 이사│곽윤섭 기자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절망도 할 수 없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가 청년들에게 던진 희망에 대한 명언이다. ‘흙수저’ 등 서글픈 청춘 용어가 난무하는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이다. 많은 청년이 “희망조차 없다”고 푸념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희망을 찾아 나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더 원대한 꿈을 향해 노력하는 청년들을 위해 정부도 여러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공감>은 경자년 새해를 맞아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룬 가슴 뜨거운 청년들을 만났다. 이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김민호 대표가 자신이 CEO로 있는 화장품 회사의 제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여기서 나는 수익을 사회에 환원할 계획이다.
토론 진행자 겸 화장품 회사 CEO 김민호대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였다. 이른바 ‘빵 셔틀’. 당시 누군가 내게 손 내밀어줬다면, 조금은 더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김민호(34) 대표의 학창 시절 유일한 소원은 ‘친구 무리에서 함께 놀아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혹독하고 괴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 그가 군 제대 이후 우연히 접한 ‘토론’ 활동은 자아를 찾게 한 시간이었다. 회복한 자신감은 곧 ‘청년을 지켜봐주고 응원하자’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생업을 포기하고 사비를 털어서까지 청년을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이제는 어엿한 퍼실리테이터(토론 진행자·Facilitator) 겸 화장품 회사 CEO로 활동하며 외로운 청년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김민호 대표를 만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종교에 심취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신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어쨌든 여러 상황 탓에 나는 그때 방치됐다.” 대구광역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김 대표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도 ‘씻는다’는 개념이 없을 정도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며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만 겨우 씻었으니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했다.
“참여·토론 과정 신문물처럼 느껴져”
왕따는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때까지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게임을 하며 보냈다. 그나마 다행히 고등학교는 집에서 먼 곳으로 진학하게 됐다. 김 대표는 “당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고맙게도 친구 한 명이 많은 도움을 줬다.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어 서툰 나를 늘 이해하고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 ‘나를 위하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람들과 관계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에게 이후 사회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군대 시절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때 나보다 두 달 고참인 이가 전역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군 생활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가 네가 안 죽고 살아서 제대한 거다.’ 그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고참이 나 몰래 많은 도움을 줬더라.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 것 같다.”
전역 후 김 대표는 방황했던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늦게라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수학원을 등록한 뒤 입시 공부에 매진했다. 그 가운데 논술 수업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루는 수업에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가 주제로 나왔다. 마침 당시 내가 있던 대구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글을 읽다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장이 펼쳐진 걸 보고 뭔가에 이끌리듯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 이후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참여 학습 모임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토론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새롭게 만들어진 정당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 “특정 이념 때문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정당 활동을 위해 서울에서 온 분들이 ‘토론’이라는 문화를 알려주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의견 대립의 결론은 ‘목소리가 큰 어른’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여와 토론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 과정들이 내겐 신문물처럼 느껴졌다.”
창당 발기인 대회 때부터 정당 일을 함께한 김 대표는 이후에도 여러 활동에 참여했다.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어서 시민단체인 ‘사랑의 연탄나눔운동’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눈앞에 펼쳐진 시민 참여와 토론, 민주주의 과정 자체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정당이 자리 잡기까지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모든 걸 쏟아부은 활동이었기에 실망감도 몇 배로 다가왔다. 결국 토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활동에 목말랐던 김 대표는 서울로 올라왔다.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물류 관련 회사에서 1년 반 정도 일만 했다.
원탁토론장 이끌며 점차 직업으로
그러던 중 대구에서 김 대표에게 토론 문화를 소개해준 토론 전문가 이병덕 ㈜코리아스픽스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다시 만나보자는 제안에 나갔다가 그날로 토론 현장에 투입됐다. 100명, 200명, 500명 원탁토론장에서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하면서 점차 직업이 되었다. 이어 시의회 의정지기단과 지역 협동조합 활동도 병행했다. 하지만 모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활동은 아니었다. 토론이 끝난 뒤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오는 날이 많았다. “몇 시간 걸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나처럼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수소문 끝에 2015년 당시 용인에서 활동하는 시의원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을 소개해줬다. 곧 뜻이 모여 ‘용인청춘놀이터 협동조합’을 설립했지만 ‘청년에게 필요한 사업을 하겠습니다’ 등의 목표가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고, 여러 어려움으로 결국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그때 사람들이 다시 만났다. 당시 불분명했던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재정비하고 청년을 위한 토론과 퍼실리테이터 교육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생산자 가운데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이들에게 판매와 컨설팅 제안도 검토 중이다.
또 김 대표는 얼마 전 화장품 회사 CEO로도 새 출발을 했다. 생산은 대기업에 위탁했지만, 판매와 홍보까지 모두 자신이 도맡아 하는 1인 기업이다. 이 화장품은 단순히 좋은 제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나는 수익을 다시 청년들에게 환원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청년뿐 아니라 다문화 가정 등 사회 소외계층에 무료로 화장품을 나눠줄 계획도 세우고 있다. “가장 큰 목적은 청년협동조합을 장기적으로 운영할 수입원을 창출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학교 밖 청소년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내가 만드는 게 화장품이라 이것밖에 줄 수 없지만, 우리 사회는 당신들을 지켜보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들에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을 때도 유일하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 강민진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