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어 안된다는 말 제일 듣기 싫었다”

2019.12.30 공감 최신호 보기


▶2019년 6월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 경기에서 LG 한선태 선수가 ‘비선수’ 출신으로 처음 1군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있다.│연합

‘비선수’ 출신 프로야구 첫 1군 데뷔 한선태 선수
2019년 6월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한국프로야구에 새 역사가 쓰였다.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 경기에서 8회 초, LG의 세 번째 투수로 낯선 얼굴이 마운드에 올랐다. 신인 투수 한선태(25)가 그 주인공이다. 초·중·고교 때 한 번도 학교 야구부에 들지 못한 ‘비선수’ 출신이 1군 무대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한선태는 이날 네 타자를 상대로 17개의 공을 던져 한 회를 실점 없이 막았다. 안타와 몸에 맞는 공을 내줬지만 병살타와 땅볼로 아웃카운트 3개를 잡아 깔끔하게 데뷔전을 마무리했다.
한선태의 2019 시즌 1군 무대 성적은 6경기 7⅓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68이다. 승패는 물론 세이브와 홀드조차 없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현실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땀과 도전의 결실이자 수많은 선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첫 승, 첫 세이브만 아니라 신인왕까지 도전해보고 싶어요.” 한선태는 2019년 12월 5일 서울 논현동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프로야구 올해의 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탔다. ‘비선수’ 출신으로 처음 1군 무대를 밟은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제2의 한선태’를 꿈꾸는 젊은 선수들에게 한선태는 그야말로 희망이다. 2019년 12월 14일 경기도 파주 운정신도시 챌린저스파크에서는 아마추어 선수를 대상으로 ‘파주 챌린저스 신인 드래프트 트라이아웃’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엘리트 선수 출신이 아닌 지망자가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선태를 보며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밝힌다. ‘비선수 출신 1호’가 만들어낸 힘이다.

폼 바꾸니 투구 속도 최고 146㎞까지
그 전까지 농구를 좋아한 한선태는 중학교 3학년 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보고는 야구에 매력을 느껴 처음 캐치볼을 시작했다. 야구에 흥미가 커진 그는 정식 선수가 되려고 인근 학교 야구부를 찾아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야구부 코치는 오랫동안 단련된 선수들과 하는 훈련을 소화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연식야구 등으로 야구에 대한 갈증을 달랜 한선태는 고교 졸업 뒤에도 포기할 수 없어 지인을 통한 개인 레슨 등으로 기술을 습득했고, 사회인 야구와 독립리그를 뛰며 꿈을 키웠다. 그는 “너무 늦어서 안 된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고 회고했다.

뒤늦게 야구를 시작해 학생 선수 출신을 따라가기도 벅찼지만 불확실한 미래가 더욱 그를 괴롭혔다.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약에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인정한 초·중·고교 야구부에 소속되지 않은 선수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른바 ‘비선수’ 출신은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었다. 제도권에 합류하기 위해 대학 신설 야구부에도 기웃거렸지만 결국 길은 없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한선태는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 들어가며 다시 한번 제도권에 도전했다. “비야구인 출신은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고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다만 가정 형편 등을 고려해 자신과 부모에게 2년만 더 해볼 것을 약속했다.

파주 챌린저스에서 코치의 조언으로 투구 폼을 교정하자 투구 속도가 크게 빨라졌다. 언더핸드(공을 아래서 올려 던지는 것)에서 사이드암(팔을 수평으로 해서 공을 던지는 것)으로 팔을 조금 올렸더니 투구 속도가 최고 146㎞까지 나왔다. 하지만 야구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제도적 한계는 더 큰 좌절이었다.
한선태는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원을 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거나 떼쓰는 게 아니고, 프로 팀에서 관심을 가져주는데도 비선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 된다는 게 억울했다”고 말했다.
한선태는 인권위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한 채 일본 독립리그에 진출했는데 그의 노력은 결국 비선수 출신에 대한 프로야구 진입장벽을 깨는 계기가 됐다. 인권위로부터 한선태의 구제 방안을 요청받은 KBO가 구단들과 논의 끝에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고 2018년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새 규칙에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자 중 KBO가 정한 시행세칙에 따라 참가 자격을 갖춘 선수가 구단에 입단하고자 할 경우, 2차 지명 30일 전까지 KBO에 2차 지명 참가를 신청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비선수’ 출신의 참가가 허용된 것이다.

박병호·강백호 등 거포들과 정면 대결 꿈꿔
한선태는 2018년 8월 ‘2019 신인 2차 드래프트’에서 10라운드 전체 95순위로 LG에 지명됐다. 10년 동안 간직해온 꿈이 마침내 실현됐다.
꿈의 무대인 1군 등판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그는 “2019년 목표는 2군 퓨처스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1군 엔트리가 확대되는 9월에 1군 무대에도 오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1군에 올라갈 기회는 2019 시즌을 개막한 뒤 3개월 만에 찾아왔다. 한선태는 당시 “1군행 통보를 받았을 때 정말 좋았다.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회를 잡은 만큼 잘하려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류중일 LG 감독은 “처음 봤을 때는 야구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선수여서 올해 1군에 올라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러나 2군에서 평이 좋았다. 아무리 2군이어도 평균자책점이 그렇게 좋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선태는 2019 시즌 1군보다 2군 잔류 기간이 더 많았지만 프로구단에 합류한 뒤 그동안의 기술, 경험 부족을 빠르게 메워가고 있다. 그의 2020년 목표도 이제 “1군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기”로 한 단계 진화했다. 박병호(키움 히어로즈)나 강백호(kt 위즈) 같은 ‘거포’들과 정면 대결도 꿈꾸는 한선태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찬영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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