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주조장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청진기를 귀에 꽂는다. 1940년대 독일에서 만들어 실제 의사들이 쓰던 ‘명품’ 청진기다. 들린다. 아주 희미하고 조그만 소리다. “사각 사각”거린다. 살짝살짝 “꼬르락 꼬르락”거리는 듯하다. 잔잔히 음악이 깔린다.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가 만들어내는 중저음의 클래식이 공간을 품위 있게 만든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이다. 청진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점차 인간의 목소리로 변경된다. “고마워요. 이리 맑고 깨끗한 물에 맛있는 찹쌀을 먹이로 줘서….” “알아주니 고맙다. 효소야.”
▶주조장 정원에 있는 막걸리 주전자. 찌그러진 노란양은 주전자가 향수를 자극한다.
수십 억, 아니 수조 마리의 누룩곰팡이와 효소, 유산균 등 미생물이 청진기를 통해 쑥쑥 자라는 소리를 전해줄 때 오병인(58) 씨의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가 번진다. 미생물들이 고마워하는 소리를 오 씨는 매일매일 듣는다. 남들은 믿지 않지만 그는 미생물의 함성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24시간 음악을 막걸리 숙성장에 틀어놓는다.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의 음악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드는 막걸리의 맞수가 세계 정상의 술인 와인과 위스키, 코냑이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일반 막걸리는 며칠간의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그가 만드는 막걸리는 ‘무려’ 한 달을 저온 숙성시킨다. 4~5일은 다른 막걸리처럼 34~35도의 따뜻한 온도에서, 나머지 25일은 15도의 선선한 기온에서 서서히 숙성하며 막걸리로 만들어진다.
▶막걸리 마니아들이 최고의 막걸리로 꼽은 해창막걸리를 만든 오병인·박리아 부부가 정원에서 포즈를 잡았다.
한 병에 11만 원짜리 막걸리, 과연 팔릴까
최고의 오디오 기기에서 나온 선율을 한 달 동안 들려주며 만들어진 그의 막걸리는 말 그대로 ‘막 걸러서 만드는’ 막걸리가 아니다. 원료도 찹쌀 80%에 멥쌀 20%다. 단맛을 내기 위한 인공감미료도 전혀 안 쓴다. 만드는 양도 많지 않다. 물론 값도 비싸다. 한 병에 1만 원이 넘는다. 다른 막걸리보다 3배 이상 비싸다. 곧 한 병에 11만 원짜리 막걸리도 출시한다. 이 프리미엄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18도. 6도인 일반 막걸리보다 알코올 도수가 3배 높다. 11만 원짜리 막걸리의 이름을 ‘롤스로이스 막걸리’로 지었다. 최고급 막걸리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다. 세계 최고의 술을 목표로 한다. 과연 팔릴까?
▶해창주조장을 방문한 소설가 조정래 씨가 남긴 메모
“이미 사겠다는 이들이 줄 서 있어요. 입소문이 다 났어요.”
2018년 전국의 전통 주점 30곳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막걸리로 꼽힌 ‘해창막걸리’는 한 번도 상업적 광고를 한 낸 적이 없다. 흔한 누리소통망(SNS) 광고도 안 했다. 그런데 2018년 전국 500여 개 막걸리 브랜드 가운데 최고의 막걸리로 선정됐다. 막걸리 마니아들에게 이미 최고의 막걸리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시인 황지우 씨의 방문 소감
막걸리는 한민족 서민의 애환을 그대로 담고 있는 술이다. 고단한 일상을 위로해주던 술이다. 가난한 시인의 예술혼을 깨우기도 했고, 모내기로 땀 흘리는 농군에게 달콤한 휴식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노동자의 목젖을 시원하게 적시며 에너지를 공급해주었고, 호주머니가 얇은 대학생들에게 도회지 유학생활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식객>으로 전국의 맛집을 소개한 허영만 화백은 새로 출시되는 11만 원짜리 프리미엄 해창막걸리의 상표를 디자인해주었다.
13년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귀촌한 동갑내기 오병인·박리아 부부가 누룩과 쌀 지게미 속에서 마침내 한국 최고의 막걸리를 주조한 배경에는 막걸리를 싸구려 술이 아닌 품위 있고 대우받는 세계 최고의 술로 만들겠다는 부부의 오랜 의지가 있다.
▶해창주조장의 100년 된 미곡 창고
회사원·은행원에서 ‘막걸리 대가’로 변신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했다. 오 씨는 회사원, 박 씨는 은행원이었다. 오 씨는 우연히 맛본 해창막걸리를 오랫동안 주문해 마셨다. 한때는 막걸리 한 말을 앉은자리에서 뚝딱 마시던 두주불사의 주당이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당시 해창막걸리를 만들던 어르신이었다. 나이가 들어 주조장을 정리하려 하니 내려와서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생면부지의 땅 해남으로 귀촌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우선 막걸리 제조법을 배웠다. 가양주 대가인 박록담 씨와 배상면주가의 창업주 배상면 씨에게 전통 막걸리 제조법을 익혔다. 7곳의 전문 기관에서 다양한 막걸리 주조법을 배운 부부는 마침내 귀촌했다. 해창은 바다의 창고(海倉)라는 풍요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해창주조장의 4대 주인장이다. 처음 주인은 일본인. 일제강점기인 1923년 시바타 히코헤이가 이곳에 정미소를 지었고, 정종을 만드는 주조장을 운영했다. 그는 광주와 목포에 정미소, 해창에 미곡 창고를 운영하면서 선박 3척을 두고 일본으로 조선 쌀을 수출하며 돈을 벌었다. 해방되면서 그의 집사이자 해남 삼화초등학교 설립자 장남문 씨가 이어받았고, 양조업에 종사하던 황의권 씨가 인수해 30여 년 동안 술을 빚다 오 씨 부부에게 넘어왔다. 먼저 아내 박 씨가 내려와 3년간 막걸리 제조법을 전수받았고, 오 씨가 직장을 정리하고 합류했다.
▶오병인 씨는 막걸리의 발효를 위해 하루 세 차례 술독을 휘젓는다.
12월 3일 아침 일찍 찾아간 해창주조장 뜰엔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가득 했다. 반찬으로 먹으려 장작불에 생선을 굽던 오 씨는 아침 식사를 권한다. 마다하기 어려웠다. 오 씨는 막걸리 두 병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한 병은 12도, 다른 한 병은 18도다. 18도짜리는 출시를 준비 중인 11만 원 하는 막걸리. “숙취도 전혀 없고, 트림도 안 나는 술입니다.” 고소한 생선 안주에 저온 숙성한 프리미엄 막걸리.
▶막걸리의 효소들이 발효되는 소리를 청진기로 확인하는 오병인 씨
맑은 물과 찹쌀이 명품 막걸리의 비결
걸쭉하다. 술술 넘어간다. 어린 시절, 잔칫날 집에서 만든 막걸리를 몰래 훔쳐 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왜 막걸리는 1달러 정도의 싼 술이어야 합니까? 이제는 한 병에 100달러짜리 막걸리가 나와야 해요. 와인, 위스키, 코냑, 사케 등은 수백 달러짜리를 마시면서 우리의 술 막걸리는 그리 저렴하게 소비해야 하나요?”
해창막걸리의 한 해 매출은 4억~5억 원. 전국 20여 곳의 이마트에 납품한다. 100곳의 주점에서 해창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장수막걸리나 지평막걸리처럼 대규모 막걸리 제조회사들의 수백억 매출에 비할 수는 없지만 부부가 정성과 열정으로 이룬 성과다. 비결이 뭘까? 비싸도 팔리는 이유는.
“우선 이곳 물이 좋아요.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 조건은 맑고 깨끗한 물입니다.
▶해창주조장 입구
오 씨는 해남의 맑은 물을 첫손으로 꼽는다. 두 번째는 찹쌀. 대부분 막걸리가 멥쌀이나 밀가루가 주된 재료인 반면 해창막걸리는 해남과 강진의 찹쌀을 주원료로 쓴다. “찹쌀은 당도가 멥쌀의 5배입니다. 그래서 단맛을 위한 아스파탐도 넣지 않아요. 자극적인 맛의 일반 막걸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낯설 수 있지만 쌀 자체의 단맛이 마실수록 깊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온 숙성이다. 오랜 시간 충분히 발효한다.
오 씨는 24시간 들려주는 음악도 꼽는다. “식물도 음악을 들려주면 잘 자랍니다. 효소 등 미생물은 분명히 음악을 즐깁니다. 생물이니까요. 음악이 효소의 발효를 왕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좋은 막걸리를 만들어줍니다.”
▶해창주조장 1대 주인인 일본인 시바타 히코헤이 씨의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젊은이들이 찾는 달보드레한 막걸리
그가 현재 만드는 해창막걸리는 모두 유산균이 살아 있는 생막걸리로 6도와 9도, 12도 세 종류. 찹쌀의 감칠맛과 멥쌀의 센 맛이 어우러진 막걸리다. 6도는 배달 주문을 받지 않는다. 전화 주문이 오면 해창막걸리를 판매하는 집 주변 식당이나 주점을 알려준다. 자신의 막걸리를 팔아주는 이들과 의리 때문이다.
한때 이 땅의 막걸리 주조장에서는 빨리 발효시키기 위해 공업용 카바이드를 쓰기도 했다. 단 이틀 만에 막걸리가 만들어졌다. 그런 막걸리를 마시면 트림을 안 할 수 없다. 위장에 들어가 발효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각종 인공감미료 탓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숙취도 피하기 어렵다. 이제 트림과 숙취가 사라지며 시금털털한 막걸리 맛이 달보드레하게 변했다. 젊은이들이 막걸리와 친숙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해창막걸리는 알코올 도수 6도, 9도, 12도 세 종류가 판매되고 있다.
해창주조장은 아기자기한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백일홍 등 다양한 식물이 사철 꽃을 피운다. 정원에는 고양이 30여 마리가 노닌다. 모두 이름이 있다. 오 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고양이의 이름은 ‘일조’. 자신이 만든 막걸리가 언젠가 전 세계 주당들에게 사랑받아 조 단위 돈을 벌어주리라는 믿음을 담았다. 주인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