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1804~1805
최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 탄 모습이 자주 보도되었다. 21세기에 말을 탄 국가 영수의 모습은 왠지 뜬금이 없다. 서구의 지도자가 휴가 중에 말을 탄 모습을 신문에서 가끔 보았다. 하지만 국가 공식 행사에서 말 탄 모습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산을 등정하려고 말을 탄 것일까? 말은 산을 잘 타지 못한다. 산에 오를 때 주로 이용하는 동물은 노새다. 사진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말을 타는 곳은 산등성이가 아니라 평지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그곳까지 간 뒤 촬영을 한 듯하다. 사진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말을 타면서 이동한다기보다 자신이 이미지가 되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촬영한 위치나 배경을 보면 특별한 사진을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국가의 탄생> 포스터, 1915. KKK단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 탄 사람이 내뿜는 존재감과 위압감
유럽 미술사에서 말을 탄 왕과 영웅을 묘사한 그림은 꾸준히 제작됐고, 그 일정한 포즈로 인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말을 탄 사람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우월한 존재감과 위압감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유명한 책 <총, 균, 쇠>에서 불과 200명도 되지 않는 스페인 모험가들이 어떻게 그보다 수십 배인 7000명 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할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총과 쇠로 무장한 무기와 갑옷, 그리고 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말을 가축으로 길들인 적이 없고, 스페인 정복자들에게서 그것을 처음 보았다. 그들은 말에 압도당했다. 사나운 속도로 달려오는 거대한 짐승을 보았을 때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건 공황 상태에 빠지는 일뿐이었다.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병사를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바로 앞에서 말을 본다면,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가축으로 말을 길들인 문명인들도 말이 자기 앞으로 달려오면 넋이 나가지 않겠는가.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원주민들은 그가 신이 아닌지 의심했다. 말을 길들이지 못한 덜 문명화한 아메리카 원주민은 물론, 말에 대한 정보가 이미 있는 유럽인 모두에게 말은 위협적인 존재임이 틀림없다.
▶<규범 기수>, 후베르트 란칭어, 1934
유럽인이라고 모든 말을 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극소수의 귀족과 군대 기병대 정도가 말을 타고 나머지는 말 탄 사람을 구경할 뿐이다. 지배자는 피지배자 앞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배타적인 재료와 기술로 만든 의복과 물건을 과시한다. 특별한 물건만으로는 우월성을 입증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웬만해선 육체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선택받은 특별한 계급의 사람은 인간적인 행위를 거부한다. 그들은 정신적인 존재로서 좀처럼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즉 걷지 않는다. 걷는다는 건 열등한 인간들의 행위이며 피지배자의 숙명이다.
서양 회화를 보면 위대한 인물은 의자에 앉아 있다. 아랫것들은 그의 주변에 서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을 보면, 레오 10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추기경들은 서 있다. 재미있는 건 서 있는 추기경이 교황과 키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추기경이 감히 교황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 안 된다. 지배자는 다리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왕의 의자는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대 위에 놓인다. 이동할 때는 가마를 타고 앉아 있다. 이 역시 다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더 높은 위치를 점유할 수 있게 해준다. 가마를 타지 않으면서 그런 자세를 만들어주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말을 타는 것이다.
인간이 가축화한 동물 가운데 말은 유일하게 탈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게 크고 힘센 동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신묘한 능력으로 보인다. 게다가 말은 생명이 없는 가마보다 훨씬 생동감과 위압감을 준다. 이런 이유로 말을 탄 왕과 장군, 귀족, 기사의 조각상과 초상이 수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주는 기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왕은 신성을 부여받은 우월한 존재감을 뽐낸다. 장군이나 기사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영웅, 영토를 확장한 정복자로 묘사되기 쉽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 묘사된 것처럼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키고자 말은 앞발을 치켜들고 갈기와 꼬리가 휘날리며 눈은 흥분 상태다. 반면 나폴레옹은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웅다움이라는 기호가 하나의 코드로 정착한다.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 포스터는 그런 코드를 재생산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라파엘로, 1518~1519
프로파간다 회화로 재현된 이미지들
이렇게 회화에서 기호가 된 이미지들은 20세기 초반 여러 선동(프로파간다) 회화와 포스터에서 재현됐다. 히틀러를 기사처럼 그린 후베르트 란칭어의 유화가 대표적이다. 주로 독재자들이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버지니아 포스트렐은 <글래머의 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근대적인 표현으로 말을 탄 사람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를 뜻한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제작된 전쟁 관련 프로파간다 포스터에도 말 탄 군인의 모습이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부터는 그런 포스터를 거의 볼 수 없다. 말을 더는 전쟁 무기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탱크에 맞서다 전멸한 폴란드 기병대처럼 말을 탄 군인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뒤 지도자는 국민을 압도하기보다 국민과 함께하는 이미지 제작에 더 열을 올린다.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동물을 지배하기보다 동물과 친근한 모습을 유포한다. 전후 지도자들은 자신의 다리를 사용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들은 주로 조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푸틴은 사냥하고 수영하는 모습을 종종 연출한다.
오늘날 지도자가 자신의 발로 걷는다는 건 곧 평등과 건강이라는 기호로 호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지도자를 말 탄 영웅으로 연출하는 것은 여전히 이 나라가 한 사람의 영웅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