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오래 쥔 게 죄냐?

2012.06.05 최신호 보기




역사 속 인물들이 훗날 평가를 받게 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동일한 행적을 보인 인물에 대해 같은 잣대로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런 평가는 객관적이지 못한 것 아닌가?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할 때 늘 제기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의외로 행적보다는 사람됨이 중요한 평가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거의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1606~1672)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전형적이다. 나이는 송준길이 한 살 위였지만 두 사람 다 은진 송씨로 이이와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이라는 점이 우선 똑같다.

게다가 둘 다 문과 응시를 거부하고 초야에서 학문수련만 하다가 효종이 즉위한 직후 특채로 벼슬길에 나섰다.

이때 조정은 공서파와 청서파로 당파가 나뉘어 있었다. 같은 서인들이지만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서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반정과는 거리를 뒀던 청서파는 공서파의 전횡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모두 청서파였고 결국 공서파의 영수인 김자점에 맞서다가 두 사람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효종 9년 두 사람은 다시 중용되어 송시열은 이조판서, 송준길은 병조판서를 맡아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또 효종 사후 예송논쟁이 터지자 남인의 3년상 주장을 막아 내고 서인의 1년상을 관철시켜 현종 초 서인의 권력장악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다만 송준길은 현종 13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 당쟁에 휩쓸릴 일이 없었다. 반면 송시열은 현종 말 2차 예송논쟁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했고 숙종이 즉위해 전권을 휘두르자 이에 맞서 서인의 당론을 지키려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 결국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단순히 좀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송시열이 송준길보다 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일까? 그보다는 더 오래 사는 동안 송시열은 권력투쟁에 깊이 관여하여 여러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닐까?

송시열은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했고 이어 같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도 노론을 대변하여 소론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서 노론으로부터는 송자라는 칭송까지 들었지만 남인이나 소론으로부터는 ‘시열이’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아마도 송준길의 경우 더 살았다고 하더라도 송시열만큼 강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성 자체가 비교적 온순 온건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조선 초 세조의 쿠데타를 적극 도운 권람과 한명회의 상반된 평가에서도 두드러진다. 사실 수양대군에게 거사를 재촉한 장본인은 한명회가 아니라 권람이다. 한명회를 안평대군 쪽에 서지 않고 수양대군 쪽에 서게 만든 사람도 권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권람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난하지 않는 반면 한명회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권람은 일찍 권력에서 손을 뗀 반면 한명회는 천수를 누릴 때까지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권력에 대해서는 너무 가까이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하지도 말라고 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불에 타서 죽을 수 있고 너무 멀면 춥기 때문이라 했던가? 이런 가르침은 21세기 첨단시대라는 요즘에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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