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작권 문제가 걸렸을 텐데 중복출판되고 있어 이상하다 여겼더니 소멸된 덕에 너도나도 출판하고 있단다. 어찌 보면 민망한 일일 법한데, 그동안 유가족이 번역을 원하지 않아 돈을 주더라도 출간할 수 없었단다. 어찌하였든지 독자 처지로서는 마냥 좋다.
기실 서점가에 나와 있던 헤밍웨이
작품들은 번역된 지 오래된 지라 요즘의 언어감각과 맞지 않아 읽어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근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들은 자타가 실력을 공인하는 번역가들이 맡아 믿을 만하다.
먼저 읽은 작품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였다. 첫 장편이라 기대하고 읽었는데 실망했다. 대화 위주라 등장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기 어려웠고 첫 장편답게 치기 어린 면이 엿보였다.
첫단추를 잘못 꿴지라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다 손에 든 것이 <노인과 바다>다. 헤밍웨이는 침체기를 겪다가 이 작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결국에는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명불허전인 법이니, 읽어보자 했다. 다 읽고 난 소감을 서둘러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내용이야 다 알잖는가.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가 무려 84일째나 고기를 한 마리도 낚아올리지 못했다. 어부가 나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바다다. 운이 더는 따라주지 않는 늙은이라는 조롱을 한 귀로 흘려보내고 고기를 낚으러 갔는데 이번에 덜컥, 큰놈을 낚은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보니 5.5미터에 이르는 대어였다.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산티아고로서는 산 채로 이 녀석을 낚아올릴 수는 없었다. 도망가는 대로 끌려가다 물 위로 자꾸 올라와 부레에 공기가 가득 차 있을 때 죽여야 했다. 고투 끝에 작살로 녀석의 명줄을 끊고 배에 묶어 항구로 돌아간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는 과정을 읽다 보면 누구나 노인이 행운을 잡았다기보다는 불운해질 거라는 예감을 품게 된다. 녀석의 피가 바다를 적시고 있는지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몰려들 터이니 말이다. 청새치를 잡느라 고생한 노인은 상어를 쫓느라 진을 뺀다.
정말, 이 작품의 백미다. 불을 보듯 결과가 뻔하다면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까? 노인은 파멸할지언정 패배는 없다는 자세로 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다시 읽으며 가슴 뜨거워지는 대목이다. 오로지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에 익숙하다 보니, 과정에 충실한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다 한 방 맞은 듯싶어서일 듯하다.
다시 읽어보며 어렸을 적에는 못 느꼈던 새로운 주제의식을 발견한 것도 큰 기쁨이었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는 신화적 생태론이 잘 녹아 있었다. 이는 옮긴이의 해설에서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노인은 바다를 ‘라 마르’라 했는데, 스페인어로 여성형이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불렀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상당부분은 노인이 자기가 잡은 대어를 두고 독백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그 내용을 곱씹어보면 원시시대 먹고살기 위해 잡은 곰을 토템으로 삼고 신성시하던 신화적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 점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 헤밍웨이의 생태적 상상력을 오늘의 우리가 제대로 이어받아야 할 터이다. 아직도 읽어야 할 헤밍웨이의 작품이 수두룩하다. 대체로 어렸을 적에 영화로만 보았지 정작 읽지 않은 작품도 많다. <노인과 바다>가 가슴에 불을 질렀다. 얼른 헤밍웨이를 만나보라고!
글·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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